독서

김시습 평전

艸貞 2010. 12. 26. 21:06

김시습 평전

 

 

심경호 지음

서울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현 고려대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중

 

펴낸곳:돌베개

 

 

 

광명중앙도서관에서 빌려 2010.10.26~12. 26일까지 꼬박 2달이 걸렸네..

 

 

 

 

 

 

또 그의 조숙한 천재성이 공자처럼 "나면서부터 알았던"(生而知之)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허조는 김시습을 만나자마자 글자를 불러주고

시구를 지어보라고 하였다.

"얘야, 늙은 날 위해 늙을 노(老) 자로 시구를 지어보아라."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

 

 

그는 이미 10대에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남화경』뿐 아니라, 도가의 경전이라고 할 『황정경』을 탐독하였다.

 

 

『북학의』의 저자로 저명한 박제가(1750~?)는 장편의 「금강산」시를 남겼는데, 그 첫머리에 "지팡이 짚고 하루에 하나씩 오른다 해도, 백 년에 삼 분의 일은 다녀야 일주할 수 있지"라 하였다. 또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빠뜨리게 되니, 천억으로 흩어두어 마음껏 찾아 볼 일"이라고 하였다. 금강산이 이루는 세계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극명하게 말한 구절이다.

 

 

 

금강산의 심장은 만폭동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하연이라는 사찰이라 한다. 해발 846m의 높은 대 위에 있는데, 뒤에는 중향성이, 앞에는 혈망봉과 담무갈봉이 병풍을 둘러친 듯 늘어서 있다. 이 마하연은 본래 신라 문무왕 원년에 의상 대사가 창건했고, 신라의 마의 태자가 이곳에서 생을 마치려 했으며, 고려의 나옹 화상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김시습은 마하연을 두고 "몇백 겁을 두고 소원을 세운 것은, 평생에 한 번 이 산 앞에 와보는 일"이라 하였다.

 

 

김시습은 내금강에서 푸른 벼랑에 학이 깃들여 이슬 내린 달밤에 기이한 울음을 우는 소리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사람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려고 말을 건네듯이 우는 산새들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위수추리', '역막파공', '불여귀', '비비' 등 네 마리 새의 지저귐을 말소리로 풀었다. '위수추리'는 "누구를 위해 명리를 좇아 내달려가느냐?"고 꾸짖고, '역막파공'은 "역시 공(空)을 파악하지 못하고는" 이라고 엄하게 야단치며, '불여귀'는 "돌아감만 못하리"라고 충고하고, '비비'는 "슬프고 슬프다" 하고 한탄하는 듯하였다. 세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도회지의 먼지 이는 길에 분주하단 말인가? 풍진이 사람 얼굴에 들러붙어 영예와 모욕 때문에 하늘을 원망하기 일쑤라니. 눈에 가득한 것은 슬픈 일뿐이고, 기로에서 갈 길이 막혀 울지 않을 수 없다. 침이나 탁 내뱉고 떠나서 계수나무 숲 속에 누움만 못하리라(「위수추리」). 그러나 세속을 떠났노라 말하는 승려들은 치의를 걸치고 좌선을 하지만, 공(空)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체득하지 못한다. 인간 세상의 도리를 업신여기고 세상의 군주와 어버이를 저버리고 저렇게 좌선을 하지만, 삼생(:전생.금생.후생)의 일은 해결하지 못하고 가슴만 답답하며 머리에는 일백 자 먼지만 쌓인 꼴이다. 차라리 속세간으로 돌아가 궁민이 됨만 못하지 않은가!(「역막파공」) 슬프고 슬픈 세상일을 말하자니 눈물만 줄줄 쏟아진다. 고작 백 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건만, 남의 부림을 당하여 재갈을 물리고 사는 꼴이란! 자기 분수에 안주할 줄 모른다면 어디서 나의 천진(天眞)을 즐길 수 있으랴!(「비비」)

오로지 기심(機心:삿된 욕망)을 버리고 나의 분수를 달게 여겨 안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김시습은 새삼 생각하였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 -보우가 이 절에서 출가했고, 나옹도 이 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1459년 말에 김시습은 『원각경』을 읽었다.

 

 

 

김시습은 지팡이(청려장)를 가로 메고, 짚신을 신고, 옷소매를 펄럭이며 길을 갔다. "나 같은 사람은 본디 맑고도 호탕한 사람이라, 만리로 집을 삼으니 마음이 넓고 넓도다" 라고 호기를 떨쳤다. 물욕을 버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한껏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 Sutta 契縷

 

 

 

얼마 있다가 마음과 세상일이 서로 어긋나 전패(顚沛:엎어지고 자빠짐)할 때 영묘(세종)와 현묘(문종)께서 잇따라 빈천(서거)하셨습니다.

마음과 세상일이 서로 어긋나 전패할 때-과거에 낙방한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

 

 

 

고려시대의 고승 보우 「태고암가」(太古庵歌)

그 가운데 일부를 보면,

 

산 위에 흰 구름 희고 또 희며                          山上白雲白又白

산 속에 흐르는 샘 뚝뚝 떨어지고 또 떨어지네.   山中流泉適又適

그 누가 흰 구름의 형용을 제대로 볼 줄 알랴      誰人解看白雲容

갰다간 비 오고, 때로는 번개 치듯 하는구나.      晴雨有時如電擊

그 누가 이 샘물 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알랴      誰人解聽此泉聲

천 번 돌고 만 번 굴러 쉬지 않고 흐르는 물.       千回萬轉流不息

 

 

 

후한 때 중모(中牟)의 수령 노공이 선정을 베풀었더니, 해충이 경내를 범하지 않았고 덕화(德化)가 새. 짐승에까지 미쳤으며 아이들까지도 어진 마음을 지니는,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간화선은 임제종(臨濟宗)에서 화두를 근거로 깨달음을 구하는 방법이다. 김시습은 오히려 화두 없이 마음을 비추어 깨달음을 구해나가는 조동종(曺洞宗)의 묵조선(墨照禪)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람이란 백 년을 못 사는 법, 이렇게 지내는 즐거움이 어떠하오?"라고 남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그는 말하였다. 도학을 공부하는 [問道] 유교 공부와 마음을 들여다보는 [觀心]불교 공부가 그리 차이가 없다고.

 

 

우리 유학의 도는 본래 물외(物外)에서 찾을 것이 아닐세. 유학이 불교와 다른 단적인 뜻을 알려면 『논어』와 『맹자』를 자세히 읽어봐야지-김수온은 시를 보내어 이렇게 꾸짖었다.

 

 

 

김시습은 시로 넌지시 답하였다.

"이 길이 비록 다르지만 마음을 기른다는 점에서는 똑같지요. 마음 기르는 방법을 다른 데서 찾을 게 무어 있습니까? 다만 일마다 자유자재하여 막힌 데가 없어야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성현이 남긴 찌꺼기에 불과한 경전을 뒤적일 게 무어 있단 말입니까?"

 

 

 

유교와 불교의 본지를 심각하게 논하자는 의도는 없었다. 그는, 유교의 본지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의리 문제에 투철하지 못한 유학자들의 행태에 불만을 가지고, 불교와 유교의 지취(旨趣)가 같으며, 일상의 삶에서 의리를 어떻게 실천하여 마음을 닦아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밝혔다. 사상의 육화(肉化)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세인은 눈 흐리고 또 마음까지 뒤숭숭해              世人蒿目又蓬心

관직 물러나면 진리를 찾아나서겠다고 말하지.     盡說休官擬遠尋

아무래도 그건 헛된 계책이라 끝내 실질이 없나니 虛計萬般終失實

구레나룻 희어지면 늙음이 육신을 침범하는 법.    빈邊霜雪老侵尋

 

                              (*긴털 드리울표에서-귀밑털 빈 한자 있슴)

 

 

'반야바라밀다'는 인간의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완전한 지혜라는 뜻으로, 이 경은 온갖 법(法)이 모두 공(空)이라는 이치를 말하고, 보살이 이 이치를 볼 때는 모든 고액(苦厄)을 면하고 열반을 구경(究竟)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 즉,더없이 뛰어난 부처님의 깨달음)를 증득(證得:깨닫는 것)한다고 설하였다.

 

 

 

그런데 김시습은 『주심경』의 주석가 '무구자'가 불교에 붙지 않았고 노자의 문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며, 우활한 유학자도 아니라고 평하였다. 또 삼교는 진수(進修:進德修業)방법이 다를 뿐 본지(취지)는 동일하다고 말하였다. 김시습은 『주심경』을 읽으면서, 무엇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 물음에 대하여 그는, 마음을 묶어두지 말고 그저 놓아두라[放下着]고 스스로 답하였다.

 

 

 

김시습은 가치가 뒤바뀐 현실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을 삭였다. 구름 흐르는 대로 떠도는 납자(衲子)의 길, 그 길은 자신을 찾아나가는 무한한 여정이다. 다만 평정의 이면에 아직도 고뇌의 앙금이 남아, 불쑥 전면에 드러나곤 하였다. 언제 지은 지 알 수 없지만 「저녁나절에 느낌이 있어」라는 시에서 나타나듯, 관조의 세계에 잠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김시습은 선(禪)을 삶의 행위 영역으로 연장시켜 보았다. 특히 여행도 선의 한 행위일 수 있었다. 후대의 일이지만 정약용(1762~1836)은 해일이라는 스님이 영남으로 유람갈 때 글을 주어, 유람도 선의 하나라고 하였다. 중국 송나라 때 약심이라는 스님이 불경을 보는 자글 보고, "당신이 보는 책은 모두 글이고, 내가 보는 책은 모두 선(禪)이다"라고 했다. 는데, 주희는 약심이 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다고 인정하였다. 정약용은 이 고사를 들어, 유람하며 관람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두 선이라고 말하였다.

 

 

 

아침에 해가 기어오른다는 부상이 아득히 안개 속에 어른거리는 듯했으며, 하늘에 닿을 듯한 흰 물결은 삼신산을 지고 있다는 신령한 자라의 등짝을 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또 붉는 구름이 땅에 거꾸로 꽂혀 있는 것은 신기루가 비낀 것이 아니랴! 그는 홀연히 선유(仙遊:신선이 되어 노닒)의 장대함을 깨달았다.

 

 

 

대숲에 와서 우는 파랑새는 은으로 이루어진 신선궁에서 한 통의 편지를 물고 온 듯하였다. 저 파랑새는 세상 바깥 신선의 거처인 십주(十洲)를 일찌감치 보았기에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허(虛)요 공(空)인 줄 알리라.

아침 해가 부상 위로 솟아나자 자색 기운이 허고에 흩어져 비단을 펼친 듯 찬란하였다. 이윽고 구름이 걷히고 맑게 갠 하늘 아래 푸른 파도가 천리 만리 한없이 펼쳐졌다. 큰 고래가 물결 타고 파도 따라 너울너울 춤추며 동해의 물을 한꺼번에 들이마실 기세더니, 갑자기 갈기를 흔들어 놀란 물결이 흩어지고 흰 무지개가 허공을 꿰뚫더니 우레가 친다. 무지개 낚싯대에 달[月] 갈고리를 달아 천 마리 소를 미끼로 삼아 저 고래를 잡아다가 세상 사라들의 아침저녁 찬으로 베푼다면 호탕한 가슴이 더욱 장쾌할 것만 같았다. 아니, 긴 끈으로 해[日] 수레를 잡아매어 일만 팔천 년을 하나의 봄으로 만들어서 세상 사람들을 『장자』에서 말하는 큰 참죽나무처럼 요절하는 일 없이 만들고도 싶었다. 대지는 여덟 기둥에 의해 떠받들려 끝도 없고 한계도 없이 퍼져 있고, 하늘과 대지 사이에는 물이 차 있어서 그 물이 미려(尾閭)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그렇게 장대한 물을 얽히고 뒤틀린 나의 간담에 쏟아부어 일만섬 수심을 다 없앨 수는 없을까? 따지고 보면 대지 위의 산악만 우람한 것이 아니다. 바닷속에도 높고 큰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어, 그 골짜기 속에 인어의 궁궐이 있다지? 산호가지는 뜰에 그늘을 이루고 옥 같은 푸른 열매는 추녀 끝에 매달려 있다고 들었다. 인어는 엷고 흰 비단은 빙초를 짜서 옥황상제에게 올려 예상(:무지개 치마)을 만들게 하는데, 분잡스레 바쁜 인간세계를 쓸어낼 수 있게 빙초 한폭을 잘라서 인간에게 팔았다. 인어는 인간 세상을 떠나 바다로 들어갈 때 눈에서 옥구슬을 쏟으면서 갔다고 하였다. 인어는 그렇게 떠나가고 만 것인가. 푸른 바다는 다시 가없고 하늘은 또 아득하기만 하다. 봉래산 곁에 굴조개들이 만들어내는 호산에는 소반 크기의 대합이 있어 기(氣)를 토하여 누대(樓臺)를 이룬다. 그것이 신기루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아방궁의 복도(複道)가 비낀 것도 같고, 어떤 때는 백옥경(白玉京:달세계) 열 두 다락과도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새에 사라져 자취조차 보이지 않고, 바닷가에는 해가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따름이다.

김시습은 장대한 동해를 바라보면서, 인간 세상이란 마치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되듯이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도를 얻은 사람들은 호탕하게 형체를 잊어버리고 육합(六合:천지와 사방) 바깥으로 부유하면서 거북이나 참죽나무처럼 수명을 유지하는 법이다.

 

 

 

 

니체는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방식에는 현재와 과거의 어디에 무게중심을 두는가에 따라 '기념비적 역사', '골동품적 역사', '비관적 역사'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기념비적 역사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과거의 일들을 찾아 기록하는 것이고, 골동품적 역사는 과거에 안주함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비판적 역사는 과거를 부정하고 과거에 대항하며,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리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김시습은 과거를 부정하고 과거에 대항하는 역사적 시선을 갖추었다. 비록 역사의 운동을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기념비로서의 역사나 골동품적 역사를 서술할 생각은 없었다. 역사를 논단하려는 의식이 앞섰다.

 

 

 

 

그는 화엄학에서 말하는 이사무애(:현상계와 법계가 서로 장애하지 않음)의 이치를 확인하고, 마음의 진여를 논하였다. 징관은 『연의초』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事:현상계)와 이(理:법계)가 둘로 갈리는 것은 바다와 물결의 관계와 같다. 물결 하나가 전체 큰 바다에 편재하여 바다와 동일하기 때문이요, 큰 바다가 전부 작은 물결에 있어서 바다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모두가 한 물결에 있고, 또 모두가 모든 물결에 있으면서 하나의 바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현실적인 모든 분별의 근저에 놓여 있는 본래적 절대경을 본원이라고 말하였다.

이 절대경은 무명에 의해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 존재란 그러한 절대경에 도달하려고 하면서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등에 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조건을 또렷하게 의식하였다.

 

 

 

그것은 자주 평상심을 잃어버리는 김시습 자신의 모습이었다.

 

 

 

"흥망이란 곧 끝없이 반복되는 법, 옛일과 지금 일로 미래를 추론하며 눈을 자주 돌린다" 라든가,

 

 

 

 

 

눈길로 그대(매화)찾아 홀로 지팡이 앞세우고 가니 雪路尋君獨杖藜

그 가운데 참 취미를 깨달은 듯 아득한 듯.             箇中眞趣悟還迷

유심(자신)이 도리어 무심(매화)이 부림을 당하여   有心却被無心使

삼 별 비끼고 서쪽에 달 질 때까지 배회하였네.       直到參橫月在西

 

 

 

김시습은 자기 자신을 유심한 존재라고 하였다. 가슴속에 수심이 가득한 상태를 두고 한 말이다. 이에 비해 매화는 무심한 존재, 자연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무심한 존재에게 유심한 존재인 자신이 부림을 당한 듯, 시간이 이슥하도록 배회한다고 하였다. 무심한 존재에게 부림받는다는 것은 실은 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무심한 존재에게 이끌려 나도 그 무심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인위(人爲)를 배격하고 자득(自得:본연의 모습을 지켜 여유로움)을 사랑한 것이다.

 

 

 

열두 살까지 말을 하지 못했던 사복을 위해 그 어머니를 장사지내주었다. 원효는 사복을 위해 그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나지를 말아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를 말아라, 나는 것이 괴롭다"라고 축원했는데, 사복이 너무 길다고 하자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괴롭구나"라고 하였다. 장사지낼 때, 사복은 '연화장계관'에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풀뿌리를 뽑은 뒤 어머니 시신을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땅이 메워지며 구멍이 없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4

「사복불언」조에 나오는 민중불교에 관한 설화이다.

 

 

원효는 신라 불교에 가장 활력을 불어넣은 민중 사상가였다.

원효는 광대의 노래에 무애가를 붙여 부르고 다니면서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였다.

 

 

인생 백 년 뒤에는 이름만 남는 법   百年後社但留名

구린내와 향내는 남들이 평하리.     遺臭遺芳人所評

 

 

 

인간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단약(丹藥)을 만들어 불멸의 삶을 이루었다는 말은 들은 일이 없다. 그렇거늘 옛날 춘추시대 제나라 경공은 산동성 임치의 남쪽 우산에 노닐다가, 자신의 나라가 그토록 아름다운데 자신은 조만간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나니!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죽음을 맞고, 번영하는 국가도 쇠망하고 만다는 것이 인간사의 당연한 법칙이거늘...... .

 

 

 

"하늘이 만물을 냈으니 기(氣)가 있으면 이(理)가 있고, 이가 있으면 도(道)는 같소. 어째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과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을 갈라서 논한단 말이오? 나는 비록 치갈을 걸친 중의 모습이지만, 뜻은 중의 그것과 다르오. 어찌하여 어리석고 허황된 자와 마찬가지로 간색인 자색(紫色)이 정색인 주(朱)의 색을 어지럽히도록 내버려두겠소? 나는 종파적 차별상에 사로잡혀 있는 중들과는 다르단 말이오."

 

 

결국 국가의 흥망성패는 어진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수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였다. 악은 한두 사람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에서 큰 힘을 행사해왔다.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는 비통한 생각에 젖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고깃덩어리 같은 돌이 있었다.

주린 새가 먹으려 했다.

그는 부드러운 고기로 생각하고

쪼아먹어 허기를 면하려 했다.

그러나 끝내 먹지 못하고

부리만 상한 채 날아가버렸다.

                                             -잡아함 제 246경

 

 

『묘법연화경』은 이 경을 하나밖에 없는 교리라고 내세우고, 이 경을 믿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어 영원히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설교한다.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부처도 모든 사람들을 고통과 번뇌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 수준에 맞게 성문. 연각. 보살의 삼승교리로 설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승 교리를 깨닫게 하려고 한다. 여기서 불타는 집은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현실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김시습은 「비유품찬」에서, 불타는 집이 바로 연화장이라고 하였다. 현실세계를 벗어난 다른 곳에 연화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부처는 본래 생(生)도 멸(滅)도 없으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 항상 담연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바로 지금이 열반의 즉처(卽處)인 셈이다. 

 

 

그런데 김시습은 「상불경보살품찬」에서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모든 부처는 중생의 마음속에 있다. 중생들이 그때 그때 부처를 이루어, 나와 남의 상(相)을 떠난다. 중생들의 몸 안에서 모든 부처가 생각생각마다 참을 증득한다" 라고 하여, 중생들이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룬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부처는 자신의 몸을 태운 그 빛으로 세계를 비추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묘법연화경을 수지(受持:가르침을 받아 잊지 않고 지님)하는 자는 반드시 본지를 체(體)로 삼고 묘행을 용(用)으로 삼아 지(知)와 행(行)을 둘 다 온전히 함으로써 자유자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비록 이와 같은 것이라 하지만, 옛사람이 말하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를 아니해도 오히려 부처가 될 종자의 인연을 맺게 되고, 배워서 성취하지 못했어도 그래도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날 과보와 같다"고 하였으니, 꼭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겠다. 하물며 이 경은 자비오 지혜로써 체를 수립하여, 성내는 사람이나 기뻐하는 사람이나 편벽된 사람이나 원만한 사람이 모두 한결같이 보배 있는 곳에 들어가게 되고, 비방하여 헐뜯고 꾸짖어 욕하는 이도 모두 수승(殊勝)한 인연을 맺게 되며, 잠깐 한 게송만 지니거나 따라서 좋아하는 자도 모두 원성(圓成)할 것이다.

 

 

불교는 현세간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므로 유교의 치국 이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김시습은, 세조가 불의의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해서는 분노했지만,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대하였다.

 

 

"옛날 고려의 태조는 도선의 도참술을 믿고 삼한을 통합하여 오백 년의 기업을 물려주었지만, 그 후 공민왕은 편조(遍照)의 청담(淸談:우주의 근원을 無로 보고 무에 대해 논하는 이야기)에 빠져 자신의 한 몸도 지키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미 신라불교에서도 의상(義湘) 대사가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 임을 외쳤지만, 그것이 결국 권력 구조를 고착화하는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김시습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원효 대사가 「발심수행장」에서 "행자(行者)라고 지음(행위.행동)이 맑으면 온 하늘이 함께 찬양하지만, 도인(道人)이라도 속세에 연연하면 착한 신이 버린다"라고 말한 대중 구원의 메시지를 더욱 좋아했던 것이리라.

 

 

 

 

 

쉬고 싶었네,

티끌 세상을 벗어나서

심장을 뜯기는 아픔을 근본부터 떠나서.

                                                   잡아함 제100경

 

 

 

김시습은 우주 생성의 항상성을 믿었다.

 

천도는 수레와 같고, 일원(一元:본체)은 잠시도 쉼이 없다. 사시(四時)가 바뀌고 별들이 도는데, 굳건한 하늘과 순한 땅이 우주 생성이 이루어지는 축(軸)이어서,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만물이 자라지 않는다. 군자는 하늘의 움직임을 본받아 지극한 정성으로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김시습은 밤이면 『이소경(離騷經)을 읊으면서 비통해 하였다. "고요한 밤 이소경을 읽어나가니, 외로운 충성 어이 이다지도 슬프단 말인가?"라고.

 

「남염부주지」에서 김시습은 우주의 이치인 정도(正道)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자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덕망이 있어야 하며, 천명(天命)과 민심이 떠나면 임금도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鄭在書, 「한국 도교문학에서의 神話의 專有」(동방비교문학회, 2002년 발표 논문)

 

 

그는 선사이면서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떠한 종교나 철학 사상도 부분적 의미밖에 지니지 않으며, 그때 그때 상화에 맞추어 쉽게 풀거나 때로는 왜곡하기도 하는 언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모든 상대적인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본래의 자아를 찾고자 했기에, 자기의 본래성을 '직지'(直指)하는 일 자체만을 소중하게 여겼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 『금오신화』를 읽어본 사람들은 김시습의 재능을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하(李賀)에 견주었다. 김시습은 만년에 스스로 그린 초상화에 붙인 찬(「自寫眞贊」)에서 "이하를 내리깔아 볼 만큼,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라고 하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귀계를 들여다보는 자의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이하의 음산하고 기괴한 환상과 견줄 만하다고 여긴 때문이리라.

 

 

 

 

고향 멀리 떠나 마음 쓸쓸하기에                   遠離鄕曲意蕭條

고불과 산꽃을 보며 적적함을 잊누나.            古佛山花遺寂료

                                                    료-갓머리에 료자 한자있슴

철관에 차를 달여 손님에게 제공하고              銕煮茶供客飮

질화로에 불 피워 향을 태우네.                      瓦爐添火辦香燒

봄 깊으매 바닷달이 쑥대 문 안에 들어오고      春深海月侵蓬戶

비 멎자 산 사슴이 약초 싹을 죄 밟았군.          雨歇山록踐藥苗

                                                    록-엄호변에 록? 한자없슴

선 경지와 나그네 정이 아담하기에                 禪境旅情俱雅淡

밤새도록 담소해도 무방하리라.                     不妨軟語徹淸宵

 

 

 

 

모친이 일찍 돌아가시고 부친의 재혼으로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했고, 조숙한 천재로서 과거에 낙방하는 좌절을 맛보았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패도(覇道)의 시대상을 겪으면서, 김시습은 떠가는 구름 흘러가는 물[行雲流水]처럼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 스스로는 '방탕한 유람'이라는 뜻에서 '탕유'라고 이름 붙였지만, 그의 여행은 고독한 방랑이었으며, 울분의 방랑이었다.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은 방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가뿐함을 느꼈을 것이다. 생명의 약동에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가 걸어간 길은 대체로 역로(驛路)였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곧게 뻗은 길이 아니었다. 구불구불하며 자유분방한 곡선과 곡면이 지배하는 길이었다. 그 길의 흐름은 생명의 고동과 보조를 같이했다. 합리적. 주지적. 기하학적인 계획의 형태가 아니었다. 김시습의 사고 활동과 감정의 흐름은 그 여행길을 따라 고동쳤다. 김시습은 자리를 박차고 나선 뒤로, 육중한 무게를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가뿐함과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서양의 속담에 "자연에는 어디에도 직선이라곤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굴곡진 자연의 길 속에서 그는 분방하게 사유하고 때로는 뜨겁게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시가 호탕(浩蕩)해서 밀물인듯 썰물인 듯 연기인 듯 구름인 듯하고, 바람을 내몰고 비를 호령하며, 노하여 꾸짖고 기뻐 웃는 것이 모두 시어가 되었다고 하였다. 김시습의 시는 성률(聲律)에 구속되지 않으면서도 형식과 구조가 문란하지 않고, 글귀를 아로새기려고 애쓰지 않아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김시습의 시는 성정(性情)에 뿌리를 두었으므로 단련과 수식을 일삼지 않아도 자연스레 시구를 이루어 장편이든 단편이든 군색하지 않았다. 그는 극도로 근심하고 분노하는 마음과 굴곡지고 뒤엉킨 가슴을 시원하게 할 수 없으면 반드시 시나 글로 발산하였다. 자유자재로 붓을 놀려, 처음에는 장난하는 듯 희롱하는 듯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들었다가 꺾어내리고 열고 닫고 하는 변화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여러 체제를 드러내고 일만 가지 형상을 다 나타냈다. 또는 높이 올렸다가 급히 꺾어내리고, 그윽하면서도 갑갑할 정도로 뜻을 깊이 함축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고 허전하게 만들고, 두렵고 엄숙하게 만든다. 또는 호기 부리고 질탕하며, 또는 한가하고 심원하면서, 간혹 농지거리와 활달한 말과 재치 있는 말을 섞기도 한다. 마치 물이 맑고 잔잔하게 구부구비 흐르다가, 갑작스런 폭풍을 만나 기슭과 바위에 부딪치면 울부짖고 격동해서 그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바로 '평평함을 얻지 못해서 울리는'[不平而鳴]문학이었다. 이자가 김시습의 의식세계를 '불평'으로만 설명한 것은 그의 의식의 깊이를 포괄한 말이라 할 수 없지만, 그의 설명은 적어도 김시습의 시에 대해서는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율곡 이이도 김시습의 지닌 시 정신의 넓이와 깊이를 예찬하였다. 김시습의시는 "성률과 격조를 그리 따지지 않았으나, 기이하여 놀랄 만한 부분은 시적 상상력이 높고 멀어서 보통 사람의 생각을 벗어났으니, 글귀나 아로새기는 자들이 발돋움하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게 누굴까. 왜 나를 두렵게 하려는 것일까. 사람일까, 신일까, 아니면 간교한 사람일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드디어 깨달았다. 이는 반드시 파피야스(Papiyas)가 나를 어지럽게 하려고 하는 것임을.

            -잡아함 제1199경, 제1200경, 제1201경

 

 

 

이때 김시습은 이제는 유교 이념에 충실한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했던 듯하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조정에는 설 수 없지만, 현군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새 왕의 조정에서는 벼슬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리라. 그래서 마침 누군가가 상경을 권유하자, 금오산실에서 일생을 마치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김수온은 유교와 불교를 회통하려고 하였기에 김시습과는 매우 친연성이 있었지만, 결국 그는 관각(館閣) 문인, 즉 제도권 내의 문인이었고 권력에 추수하는 인물이었다. 김시습은 그의 그러한 측면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대와 이웃에 살아               幸興公家接近隣

죽마 타고 놀며 빈번히 왕래하던 옛일이 그립구려 戱嬉竹馬往來頻

그대는 황석공에게 병법을 전해 받아 명장이 되고 君傳黃石爲名將

나는 치문(불교)에 들어가 도인이 되었다오.    我入緇門作道人

 

 

 

 

다른 날 상봉하여 공업을 따질 적에       相逢異日論功業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자세히 말해보세.      誰是誰非細細陳

 

 

 

 

 

그의 '글쓰기'는 '철학하는 일'이었다.

 

 

 

 

 

'자기 영혼과의 대화'를 글로 적었으며,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신뢰할 만한 결론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다.

 

 

 

 

 

불길이 한창 타올라가는 것도 혹 끌수가 있고, 물길이 하늘에 치닿는 것도 혹 막을수가 있다. 화단(禍端)은 위태한 데 있지 않고 편안함에 있으며, 복은 경사스러운 데 있지 않고 근심하는 데 있는 법이다. 근심하고 걱정하는 때야말로 복과 경사를 불러오는 기초가 되는 것이요, 무사하고 편안한 때야말로 화단과 해독의 싹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왕의 공업(功業)은 근심하고 걱정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고, 편안해 하고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망하지 않는 법이 없다. 오직 대업(大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의 가정과 일신(一身)의 경우에 제가(齊家) 되고 안 되고 하는 것과 수신(修身)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 또한 방촌(方寸:마음)이 바른가 바르지 못한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국가를 다스리고 가정을 편안하게 하는데는 무엇보다도 심술(心術)을 바로잡는 일이 먼저이다. 그런데 심술을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자기의 의지(意志)를 정성스럽게 해야만 곧 내 마음에 쾌함과 족함이 있게 된다. 그리고 나의 의지를 성실하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게 하는것은, 반드시 먼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극에 도달함으로써 자기의 지(知)를 극치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런 뒤에야 이치의 크고 작은 것, 자세하고 거친 것 할 것 없이 그 근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 근원을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나라의 정치는 편안할수록 위태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라는 것은 '거안사위'(居安思危)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았다.

 

 

 

김시습이 '격물치지'가 '의지를 성실하게 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음'의 관건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김시습의 「정치는 반드시 삼대를 본받아야 한다」는 글은 북송의 장재(張載0가 신종(神宗, 1048~1085)의 자문에 응하여 "정치를 하면서 삼대(하. 은. 주0를 본받지 않는 것은 결국 구차한 도리입니다." 라고 답했던 말에서 논제를 끌어온 것이다. 신종은 장재의 대답을 듣고 기뻐하며 장재를 숭문교서(崇文校書)로 삼고 왕안석(王安石)과 함께 신법(新法)을 의논하게 했는데, 장재는 왕안석과 뜻이 맞지 않자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고 한다. 

 

 

 

 

김시습은 「민을 사랑하는 이치에 대하여」(愛民義)라는 논문을 남겨, "민을 사랑하라"는 정치철학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상적인 정치는 '어진 정치'[仁政]라고 하였다.

 

 

어진 정치란 입김을 불어넣어 따스하게 함도 아니고 손으로 쓰다듬어줌도 아니다. 오직 농사와 잠업(蠶業)을 장려하고 각자 생업에 힘쓰도록 권장하는 것일 따름이다.

 

 

김시습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사욕을 줄이고 공의(公義)를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군주가 "인으로써 재물을 낳고 의로써 사용을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김시습은 성동 수락산에 정착한 뒤로 서거정을 찾아가 시를 구하고 시통을 교환하였다. "강산 풍월을 즐기는 이 나그네 생활과 그대의 험난한 벼슬살이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하고 넌지시 물었다.

 

 

 

그대와의 교유는 너무도 행운이오       交遊多自幸

후생의 인연을 다시 맺고 싶구려.        更結後生因

 

 

 

그렇기에 청한자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궁할수록 강직해야 하고 위태할수록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전제하고,

 

 

 

 

이 뒤에 김시습은 박계손의 가계와 생몰. 상례. 후손에 대하여 적고,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나는 산수에 유랑하는 뜨내기여서 세상에서 알아주는 이가 없고 오직 공만이 나를 알아주었는데, 이제는 끝장이구나. 이제는 끝장이구나. 아!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와 짝이 된단 말인가?

 

 

 

갰다 했더니 또 비가 오니                              作晴還雨雨還晴

하늘의 움직임도 그러하거니 세태야 어떠하랴.  天道猶然況世情

나를 칭찬하는가 했더니 어느새 나를 헐뜯고     譽我便是還毁我

명예를 피하는 척하다가 명예를 구하네.           逃名却自爲求名

꽃이 피고 지는 걸 봄이 어찌 다스리리             花開花謝春何管

구름 가고 구름 와도 산은 다투지 않는구나.      雲去雲來山不爭

사람들에게 말하나니, 부디 기억해두오            寄語世人須記認

예말고 평생 어디서도 즐거울 수 없다는 걸.      取歡無處得平生

 

 

 

 

실제와 동떨어지게 남을 칭찬하는 사람은 그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언제 상대를 헐뜯을지 모를 일이다. 외간(外間)의 명예와 모욕은 나의 본질과는 사실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기에 김시습은 변덕스러운 세태 인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봄은 꽃 때문에 봄다워진다고 하지만, 봄은 꽃이야 피든 지든 관심 없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가고 올 따름이다. 산 위로 넘나드는 구름에 따라 산의 얼굴도 달라지게 마련이라지만, 산은 구름이야 가든 오든 아무것도 요구하는 법 없이 그저 저 흐르는 대로 맡겨놓을 뿐이다. 인간은 공연히 제 스스로 바빠 입신출세다 부귀공명이다 안달하지만, 설사 바라는 대로 그것들을 얻었다 한들 마침내 그것이 무엇이랴? 기쁨도 잠깐의 일, 그것에는 새로운 고뇌가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어디든 뿌리내려 생애를 자득(自得)할 만큼의 기쁨을 얻을 곳이란 이 지상에 아무 데도 없다. 대자연처럼 욕심 없이, 얽히지말고 당당하고 유유히 순리대로 살아가는 거기에 오히려 삶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선행은 김시습에게 심하게 매를 맞으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선행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스님이 산 속에 계실 때, 작은 표주박에 물을 가득 채워서 불좌(佛座)앞에 바치고 아침부터 밤이 새기까지 사흘간을 그렇게 않아 계셨습니다. 선정(禪定)에 드시길 이렇게 하시니, 이분이 부처님이 아니고 누구이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진심으로 복종하여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는 것이랍니다.

 

 

 

언젠가 선행이 스승을 흉내내어 시축(詩軸)을 엮자 김시습은 다음과 같은 시를 적어주었다.

 

이 나이 마흔 넘어 또 몇 해                        年來四十又加年

이름 나지 못하고 도도 깊지 못하다.            於世無聞道未玄

넌 두 기(紀)를 넘은 배추벌레                    汝作桑虫逾二紀

난 세 잠을 잔 봄 누에.                              我如春蟻已三眠

한가한 속에 옛 잘못 반성하고                    閑中猛省前非事

이제가 옳다는 시(도연명 「歸去來辭」)를 꿈에서도 읊노라.

                                                            夢裏常吟今是篇

상(商)이 날 깨우쳤다는 공자 말씀은 옛말이로군.

                                                            商也起子終古語

더욱 채찍질하여 청풍명월을 노래하게나.     淸風明月勸加鞭

 

 

"그저 말로에 몸에 병이 없기만 생각하고, 평소 머리에 굴레가 없는 것을 기뻐할 따름이지" 라고 위로하였다.

 

 

 

 

작은 집 뺑대문을 닫고 있자니                 小室俺蓮門

적적해서 나를 대해 말을 하는 거다.   廖-갓머리:쓸쓸할료廖對爾言
뜨락의 꽃은 피었다간 떨어지고          庭花開便落
섬돌의 풀은 깎아도 도로 성하구나.    階草盞-선칼도방:깍을잔還繁
묵좌(정좌)하려 해도 시마(詩魔)가 방해하니  默坐詩成崇
성가신 일도 없는 걸, 낮잠이나 자자.           閑眠事不煩
궁한 삶을 누가 좋다 말하랴                       窮居誰道好
장맛비에 울타리 무너졌구나.                     積雨壞籬樊

 

 

 

김시습은 세조의 단종 폐위를 불의로 여겨 절의의 뜻을 굳혔으므로,


내게 몇 마지기 밭이 있는데           我有數畝田
울퉁불퉁 벼랑 곁에 있지.          高下依巖琦-돌석:굽은낭떠러지기
콩 심고 김매지 않았더니               種豆蕪不治
풀만 무성하고 콩 싹이 드물다.      草盛豆苗稀
하늘 우러러 흥얼흥얼 노래하며     仰天歌鳴鳴
가만히 옛사람을 생각하네.            靜言思古人
사람은 모름지기 즐겁게 지낼 일    人生行樂耳
부귀는 내 몸을 괴롭히는 것.         富貴勞我身
내 몸은 다시 생각하지 말자          我身勿復慮
잘 되고 못 되고는 하늘에 달린 걸. 否泰在蒼旻
여러 사람 떠들고 짓씹어대어        衆人正啁礁
세상과 나는 서로 모순되었네.       世我相矛盾
도연명의 시에나 화운하면서         細和淵明詩
조화가 하는 대로 무(無:죽음)로 돌아가리.  乘化以歸盡

 


김시습은 이렇게 말한다. "남들은 나더러 미친 짓을 잘 한다고

하지만, 내 소원은 남들이 그런 내 겉모습에 헷갈리지 말기를 바란다. 군자의 의지는 굳세고 강하여 돌리기 어려운 법"이라고


정절(도연명의 시호)이 유송에서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것은
세상과 어긋났기 때문이다. 백이가 주나라를 버리고 떠나가니 그를
일러 성인중에서 맑은 이라 하였고, 전금이 노나라에서 벼슬하니 이를 일러 성인 중에서 화(和)한 이라 하였으며, 이윤이 은나라로 가니 이를 가리켜 성인 중에서 자임한 이라 하였다. 그들이 성인이란 점에서는 한가지이다. 이사가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양웅이 신에서 벼슬한 것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비록 다르다 하지만, 이익을 구하고 의리를 배반한 점에서는 한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의 거취와 은현은 먼저 그것이 의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그리고 도리를 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리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반드시 버리고 갔다고 현명하고 벼슬에 나아갔다고 아첨이라고 할 수 없으며, 숨었다고 고상하고 나타났다고 구차하다고 할 수는 없다.

 

 

 

천고에 이름 높은 시상의 그분
아름다워라 군자시여.
귀거래사를 음미해보면
청풍이 물씬 새로워라.
방에 들어가면 동이에 술이 그득하였고
거닐며 꽃나무를 보고 흐뭇해 하였지.
변화에 내맡겨 무(죽음)에 이르도록
기쁨이 언제나 진진하였네.
나 또한 기편자(불구자, 불완전한 자)로서
산천을 이웃으로 삼는다오.
                                        -오언절시 한자 있슴- p335

 

 


뭇 사람은 나를 오활하다 헐뜯으며
물이 더러우면 흙탕질하면 되지 않느냐 말한다.
그렇지만 저급한 속요는
양춘곡과 조화할 수 없는 법.
남들은 내가 미친 척한다고 하지만
나는 남들이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네.
군자의 뜻은
굳세고 강하여 되돌리기 어렵나니.
                                        -오언절시 한자 있슴 -p336

 

 

 

 

자신의 '거짓 미치광이짓'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자신의 겉 행태만 보고 규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은 군자로서의 뜻이 억세고 강하여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말하였다.

 


나는야 본시 인간 밖의 사람
마침 또 인간 밖 경치 찾았네.
취향에 들어 기분이 좋아
오똑하게 깨어 있길 원치 않늗다.
기세등등 자귿한다만
행동은 추스리질 못하네.
이 몸은 거들먹거려 웃어도
이 마음은 언제나 깨어 있나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천리가 정말 분명한 걸.
                                           -오언절시 한자 있슴-p337

 

 


하지만 그는 외로운 새처럼 홀로 자연 속으로 돌아왔고,
자연 속에서 자신의 한평생이 넉넉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인간세계의 세사함과 번다함을 초월해서 그윽한 운치를 유지하리라
예상하였다.

대도(大道)가 행해지지 않고, 비색한 운명 또한 풀릴 길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불의의 세간과 타협하지 않고 '군자'로서의 지조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또 반복해야 했다.

 

 

명(命)은 바른 이치(正理)이다.

이 구절은 "사람은 나면서 각각 천리를 품부받는데, 어진 사람은 그 아끼는 바의 본분을 지키므로 그 선을 행하는 마음을 다시 안정시키고 그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그 숭상하는 뜻을 광대하게 할 수 있으며, 그 결렬한 기운을 분발할 수 있으니, 어찌 족히 소인이 나를 해하려는 것에 놀라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으랴"라고 말한 것이다. 『중용』에서 말한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의 처지에서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한다"는 뜻이다.

 


김시습은 세속을 떠나 자적한 마음만 지닌 것이 결코 아니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흘러가는 세월이 두려워, "홀홀 시절은 바뀌거늘, 어정대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네"하고 탄식하였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우울함을 느낀 김시습은 자화상을 그리듯
자신의 지난날을 술회했으며, 조롱조의 말로 시를 적어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행해지지 못하는 세상을 스스로 잠시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였다. 그러한 자부심이 우주의 생생(生生)하는 기운과 동화된 듯한 호방한 기질로 상승하였다. 김시습은 곧잘 술 속으로 도망하였고, 술에 취해 속에 있는 생각을 대범하게 내뱉었다.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술에 취해서」라는 시에서 그의 취흥이 어떻했는지를 살필 수 있다.

 

 

 

술 얻고는 미치도록 기쁘다
넘어지고 자빠지는 내 인생.
장자는 호접몽에서 깨어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했고
당나라 원재는 코 큰 마귀의 꾀임에 살해되었지.
꽃핀 세 갈래 길에 노님은 장후와 같고
시단에서 독보함은 조나라 염파같구나.
산에게 묻나니, 나는 대체 무엇 하는 자냐
우주가 열린 뒤로 나를 아는가 모르는가.
                                    -칠언절시 한자 있슴-p343

 

 


김시습은 자신을 장후에게 견주었다. 이 비유는 심상치 않다.
장후는 왕망이 한나라의 정권을 빼앗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해서 오직 구중 . 양중 두 사람하고만 교유했으며, 그래서 세 갈래 길을 열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자신의 은둔이 장후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세상과 단절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내비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정신을 한 군데로 집중하기 싫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죽나무가 목재가 되지 못한 채 천명을 다하듯, 그도 세상에 쓰이지 않고 세월을 그냥 지그시 흘려보내는 것이 더 좋았다. 강이나 호수에 도롱이 걸치고 나가 낚시질이나 하면서.

 

 

김시습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의 삶에 공감하였다. 편안히 거처하며 배불리 먹는 무리들에게 끓어오르는 증오를 느꼈다. 또한 김시습은 제목에서 부적합한 인물이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 자가 그런 임무를 맡게 되었는가?"라며 여러 날을 통곡하였다. 그 울음은 인민들의 고통을 한 목소리로 짜낸 것인 듯 산을 울렸을 것이다.

 


나는 성동에 밭을 빌려서, 벼슬 구하지 않고 노동을 한다. 고 하였다.


배부르고 싶고
옷 따스하길 바라는 건,
사람마다 꼭같은 마음이지만
넉넉하기란 정말 어려운 법.
나는 성동에 땅을 빌려
녹봉 대신 노동하여 수확하니,
반은 새와 쥐가 갉아먹어도
맑은 시절의 신하로서 얼굴을 펼 만하다.
묽은 죽이 아침저녁으로 번들거려도
구름 덮인 소나무 문을 굳게 잠그고,
처지를 달게 여겨 아첨도 교만도 않기에
탄식할 일 하나 없구만.
                                        -오언절시 한자 있슴-p346

 

 

 


"모름지기 이 생명을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법,
인생 백 년은 하나의 뜬 먼지와 같기에" 김스십은 이렇게 지나친 욕심을 경계했으니, 그것은 그가 『노자』를 따라 '욕심을 줄이는' 삶이 가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천 년 뒤의 나는 충성된 마음 품고
연하 속에 자취 감춰 세월을 보내노라.
나라 생각하는 회포에 젖어 한 곡조 노래하고
지금을 슬퍼하는 외로운 분노에 세 번 휘파람.
이 세상에 혹처럼 붙어 살며 재주 없어 우습다만
외톨이기에 욕됨 없음을 자랑하지.
굴원과 가의의 전기를 자세히 읽었거늘
함부로 세상에 나가 일생 그르칠 게 무어 있나.
                                        -칠언절시 한자 있슴-p357

 

 

 

 

가리고 고름을 내 손바닥에서 하네.

유유하게 얻는 것 있어
얽고 합하여 두셋은 분별하지.
당대에 시행하지 못하여 한스럽기에
탄식하며 통분해 하는 마음 많다네.
이 잡으며 한바탕 긴 한숨
석양빛이 서실 창 안으로 파고드는군.
                                        -오언절시 한자 있슴-p362

 

 

역사의 포폄(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것)을 중시한 김시습은 『춘추』를 탐독하고, 「좌씨춘추를 읽고」와 「춘추를 읽고 쓴 시」를 남겼다. 「좌씨춘추를 읽고」에서는 공자가 미언으로 포폄을 했지만, 정의가 사라지고 선악이 분분한 당대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시습의 인물찬의 대상은 백이 숙제, 한나라 장량등이다.
인물전의 대상은 제갈량, 주돈이 등이다.

 

 


선리는 아주 깊어서 생각하기를 다섯 해나 해야만 투명하게 깨우친다.
우리 도로 말하면 본래 등급이 있어서 마치 건강한 자가 사닥다리를 오를 때 한 발을 들면 곧장 한 층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 돈오하여 신속하게 결판을 내는 즐거움은 없지만, 우유하여 젖어드는 맛이 있다.

 

 

김시습은 먼저 「송계」에서 "자애를 강조한 부처의 근본 뜻이야말로 군자는 백성을 사랑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함을 알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하여, 유교의 실천 윤리 규범을 기준으로 불교의 교리를 풀이하고 이상적인 왕도정치에 귀결시켰다. 또 「위주」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은 안민제중(민중을 편안하게 하고 구제함)에 있다"고 하여 민생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불교사상을 논하였다.

 

 

 


무사(無思)에서 그는 "정신을 날로 가다듬고 사려하여, 도(道)를 하는 까닭과 배우는 까닭을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결국 불교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개체가 자신의 '본래성', 곧 '생명'을 만나는 과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현정론』은 서론과 14개 항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개개인의 해탈에 있으며, 그 방법은 "정(情)을 제거하고 성(性)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은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사람에게는 염(染)과 정(淨)이 있고 선과 악이 있지만, 그것은 원래 성이 미혹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누구든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정을 자주 제거하여 마음의 바름을 얻으면, 그 이익은 마음에서 일신, 집안, 나라, 천하로 미친다고 하였다. 나아가『현정론』은 교화 면에서 유교가 불교를 보완할 수 있다고 보면서, 유교의 오상(五常)과 불교의 오계(五戒)를 배당하였다. 즉, 죽이지 않음〔不殺〕을 인(仁), 도둑질하지 않음 〔不盜〕을 의(義), 간음하지 않음 〔不淫〕을 예(禮), 술마시지 않음 〔不飮酒〕을 지(智), 함부로 말하지 않음〔不妄語〕을 신(信)에 대응시켰다.『현정론』의 뒤를 이어 저술되었다고 전하는 『유석질의론』은 서론과 19개 항의 문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유. 불. 도 삼교는 성인이 백성의 병을 가르치는 큰 가르침이되 순서와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전제하고, "삼교가 모두 마음에 근본했으나 유교는 마음의 자취를, 불교는 진심을, 도교는 자위와 진심 사이를 접한 도"라고 규정한 뒤, "나타나 볼 수 있는 것은 자취이고 오묘하여 볼 수 없는 것은 성(性)이니, 볼 수 없는 것은 도가 멀고 깊으며, 볼 수 있는 것은 가깝고 얕다. 따라서 유교는 불교의 대각의 경계에 미필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현정론』과 『유석질의론』은 삼교를 절충하거나 불교가 우위에 있다고 은근히 주장했을 뿐, 사실 인간 존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시습은 1475년(성종 6)에 『십현담요해』를 저술하고, 1476년(성종 7)에 의상의 『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에 주를 달아서 인간 존재의 근본문제를 사유하였다.

 

 

 

편과 정이 서로 작용하여 다음과 같은 수행의 다섯 단계가 나온다.
◐정중편(正中偏):정 중의 편,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개체〔多〕안의 전체 〔一〕, 중생 〔世界〕안의 부처, 색(色)안의 공, 차별 속의 평등, 특수 속의 보편, 사물 속의 이치.
◑편중정(偏中正):편 중의 정. 본체계를 가리키는 현상. 전체〔一〕안의 개체 〔多〕, 부처 안의 중생, 공 안의 색, 평등 속의 차별, 보편 속의 특수, 이치 속의 사물.
◎정중래(正中來): 정 중에서 오다. 본체에서 의식적으로 현상계로 돌아옴. 지혜가 생활로, 앎이 실천으로 바뀜.
○겸중지(兼中至):겸 중에 이르다. 양계가 조화를 이룸. 이원성을 넘어서 크게 깨달음. 〔또는 편중지라고도 한다.〕
●겸중도(兼中到):겸 중에 낙착되다. 조화의 핵심에 이름. 위의 네 위에 조금도 막히지 않고 모두를 융합해서 자유자재함.

 

 

중생이 선악의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에 따라 윤회하여 이르는 여섯 세계. 곧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

 

 

 

그리고 「심인」의 마지막 부분에서 김시습은 작위하지 않는 가운데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연교」의 주에서 김시습은, 부처가 녹야원에서 4제.12인연.6바라밀 등을 설법한 뒤, 식견 얕은 자들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므로 방등경전을 설하고 나서 『반야경』을 설하여 모든 법이 공이라고 했지만, 다시 사람들이 공에 집착하므로 마지막에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하여 일승(一乘)의 묘법을 이루게 했다고 말하였다. 부처의 교설은 『화엄경』에서 시작하여 『열반경』에서 매듭지어졌다고 일컬어지는데, 그 사이에는 화의적으로든 화법적으로든 여러 차이를 지닌 경전들이 있다. 김시습은 『법화경』과 『열반경』을 궁극적인 일승의 경전으로 보았으니, 이것은 천태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불교의 중심 교리. 4성제라고도 한다. 고(苦)에 관한 진리, 고의 원인에 관한 진리, 고의 소멸. 열반에 관한 진리, 적정.통찰.깨달음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한다.

 

과거에 지은 업에 따라 현재의 과보를 받으며, 현재의 업에 따라 미래의 고를 받는 12가지 인연.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를 말한다.

 

보살이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 보시,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한다.

 

 

 

김시습은 '성지'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보리와 열반의 길 아득한 것 아니니
그깟 공부랬자 반나절의 일일 뿐.
한 구름 궤뚫을 때 천 구절이 환해지고
성심 지운 곳에 망심도 지워지네.
조등 잇는 것은 다만 나의 문제이니
심인의 전지를 밖에서 맞을 게 아니지.
그저 이 마음 성성하다면
삼구와 삼요는 따져 무엇하리.
                                        -칠언절시 한자 있슴-p389

 

 

 

 

김시습은 화엄의 성기법계가 돈오의 선 체험과 근본적으로 서로 의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깨달음이란 별도의 광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늘 깨어 있는 마음 상태를 뜻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가  '일상응연의 곳'에서 마음 닦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의상의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은 '법성원융무이상'에서 시작하여 '본래부동명위불'로 끝나는 칠언 30구의 게송이다. 그래서 '법성게'라고도 한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종파를 가리지 않고 불교의식이 끝날 무렵에 의상의 이 법성게를 독송한다. 또한 이 『법계도』는 깨달음의 경지에 드러난 우주 전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어서 '해인도'라고도 하는데, 중앙에서 시작하여 54번 꺾인 끝에 다시 한가운데에서 끝나는 도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송 앞에는 『법계도』를 짓는 의도를 적었고, 뒤에는 『법계도』의 의미를 설명한 석문을 붙였다.

 


『화엄경』은 근기와 법 사이에 어떠한 상흔도 찾아볼 수 없는 청정무구한 기법일체관 위에 성립한다. 이것은 『법화경』과 다른다. 『법화경』은 부처가 이(理)를 열어보여 중생들이 증오하도록 하기에 근기와 법에 분열과 대리빙 있을 수 있음을 예상한다. 화엄세계에서는 이승의 실체가 부정되며, 모든 이승은 이미 회귀를 다했기에 다시 회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화엄경』은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는 가장 본원적인 구경의 일승교를 건립하였다. 그런데 일(一)과 다(多)의 부정을 말하는 사상은 도를 일로 표현하는 노자나 장자의 철학과 다르지 않고, 태극을 일로 보거나 성(性)이나 도를 일로 보는 주자학과 다르지 않다. 불교에서의 조화는 초월세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주자학의 조화는 현실세계에서 성취된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위대한 단일성'을 뜻하는 도는 장자의 제물(齊物)사상이나, 주자학의 이일(理一)사상과 통할 수 있다.

 


김시습은 『화엄경』의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논리를 신분 질서의 문제로까지 확장하지는 않았다.

 


차별 없는 평등한 세계인 진리계와 차별의 세계인 현상계는 서로 독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 융화하여 현상계 자체가 그대로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학열은 신미에 버금가는 고승이었다. 신미는 김수온의 형이다. 세조는 신미, 학열에 또 한 사람 학조를 더하여 3화상이라고 부르며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난수정 앞에서는 갈매기와 친하고
의상대 가에서는 조각배를 보노라.
참선 마음 담박하기는 창해와 같고
법상이 평화롭기는 흰 소와 같구려.
늙어가매 이마에는 눈이 생겼고
한가하여 구름과 달 외엔 짝이 없으리.
파도 소리 산 빛은 티끌마다 불법이 있다는 게송
지각 없는 사람에겐 꿈 이야기 그만두었네.
                                  -칠언절시 한자 있슴-p394

 

 

 

그대는 보라, 청정한 도는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분노와 욕심, 오직 그것 때문에 마음이 제상에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인도 경계하기를, 분노를 억누르고 욕심을 막으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름길이니, 군자는 모름지기 홀로 있음을 삼가야 한다. 정욕이 한 번이라도 싹트면, 그것 때문에 얽히고 갇히는 법. 천축국의 옛 선생이 설산에서 머리를 깎은 것은 오직 이 중생을 위한 것이었으니, 중생들이 골몰하여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자 태자가 입는 화려한 면복을 벗어 던지고, 부지런히 여섯 해 동안 고요함을 닦았다. 성과 색의 즐거움을 싫어하고, 이무기와 구렁이가 들끓는 경지를 사랑하였도다. 부디 그대들은 담박한 마음을 보존하여, 하루아침에 깨우치기를 기약하라. 그러면 비로소 알게 되리라, 중생을 건네는 배는 원래가 큰 거룻배라는 것을.

 


1498년(연산군 4)8월에 유자광, 윤필상 등이 죽림칠현의 행적을 무고하는 계를 올려, 홍유손은 '여럿이 모여 술을 마셔대며 조정을 비방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세상을 가벼이 여겼다'는 죄목으로 9월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홍유손은 처음에는 성리학을 공부했으나, 점차 불교나 노장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김시습은 그에게 『천둔검법연마결』을 전수했고, 홍유손은 그것을 밀양 박씨 묘관에게 전수시켜, 조선 단학파이 맥을 형성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홍유손은 성균관 유생인 김 아무개에게 보낸 글에서, 병을 다스리는 방책은 의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기를 잘 조절하여 보호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가의 옥함보방에 수록된 설도 모두 양생술이며, 만일 음식을 절제하지 않고 심신을 잘 지키지 않는다면, 몸이 위태한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는 같은 글에서, 수명의 길고 짧음은 모두 자기 스스로 취하는 것이지 남이 그렇게 되도록 시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이 주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몸을 중시하는 그의 양생관은 김시습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

 

 

 

내 재주는 버선에서 끌러낸 실같이 짧기만 하니
취하여 조물주에게 미친 노래를 바칩니다.
무능한 꼬락서니 십 년에 너덜너덜하고
조그마한 오막살이 한 세상 황량하구려.
고죽의 성근 그림자에 의지해 잠들고
수심 벌레의 찍찍 우는 창자를 대하여 시를 읊지요.
이 몸 두고 헛늙었다고는 말하지 말아요
잘난 이름을 은둔처에 전파하리니.
                                    -칠언절시 한자 있슴-p411

 

 

 

그때 남효온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였다.

첫째, 혼인의 폐물로 사치한 물건을 금하고, 스물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으면 그 부모나 형제, 족당을 죄책하여 성혼을 하게 하십시오. 과년한데도 혼자 사는 사람들의 원한을 없애면 음양이 조화하여 재난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외직에 나가는 수령을 고를 때 학문에 능하고 어진 사람을 발탁하십시오. 이조, 사헌부, 의정부에서 차례로 인물을 잘 살핀 뒤 전하께서 마지막으로 인물됨을 보고 등용해야 합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에 옳은 사람을 얻으면 백성의 원망이 사라져서 재난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산림과 초야에서 인재를 등용하십시오. 산림의 유일인 경연과 같은 인물을 신임하시면 어진 사람이 조정에 많이 모여 왕가를 도와 재난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내수사를 없애야 합니다. 궁중은 경에게 지급하는 녹은 10배를 쓰는 데도 각 고을에 '본궁농사'를 세우고 사사로이 곡시과 포백을 비축해서 백성에게 매매하여 이익을 취하고, 또 서울 안에는 내수사를 세워 별좌와 서제(서리)들이 고을에 왕래하면서 끝없이 주구하고 있습니다. 내수사를 혁파하여 민심을 위로한다면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무당과 불교를 물리쳐야 합니다. 나라의 물자를 축내고 화복설의 설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국무와 주지를 없애면 하늘과 사람이 화합하여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학교를 부흥해야 합니다. 현인 군자를 얻어서 사표를 삼으면 학교가 일어나고 인재가 나올 것이니, 인재가 나와서 명신이 성하면 재난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 삼강오륜의 덕을 선포하여 풍속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주관(즉,주례를 말함)에서 그랬듯이 불효와 불목한 자에게 형벌을 가해서 나머지 사람을 경계함으로써 교화를 행하면 풍속이 바로잡혀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덟째, 문종의 비였던 소릉을 신원하여 추복해야 합니다.

 

 


정창손의 남효온이 상소한 내용이 모두 적절하지 못하다고 못박았다.
동부승지 이경동은 남효온, 이심원, 강응정, 박연등이 마치 중국 전국시대의 처사들처럼 횡의(함부로 논의하거나 비평함)한다고 비판하고, 남효온이 스승을 부정한 것을 문제 삼았다. 4월 20일(신해)에는 서거정이, 스승을 업신여긴 남효온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을철 석 잔 술로 도에 통하고
봄바람에 시 한 수를 읊는다만,
좋은 사람 불러도 오지 않으니
누구랑 거닐며 즐거워하랴.

세간의 하릴없는 놈들은 나를 두고 까까머리 선생이라고 비웃는다만,
내 속을 누가 알랴. 나는 봄날의 생의(生意)를 마음껏 즐기련다.

 

 


『황정경』은 위진 시대에 도가들이 양생과 수련의 원리를 가르치는 데 사용했던 도교 서적이다. 『포박자』「하람」편에 그 이름이 나오며, 칠언가결 형식으로 씌어진 초기 도교 경전이다. 주해서가 아주 많은데, 양구자와 무성자의 주석이 널리 유행하였다. 서양에서도 'Classic of the Yellow Court'로 유명하다. 황정은 인간의 성(性)과 명(命)의 근본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뇌.심장.비장들을 말한다.
원래는 『태상황정내경옥경』과 『태상황정외경옥경』이 있는데, 전자인 『내경경』36장과 후자인『외경경』은 내용상 서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 그 밖에 『태상황정중경옥경』이 있으나, 『중경경』은 『황정경』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황정경』은 명리를 탐내지 말고 염담, 무욕, 허무자연의 마음 상태를 지니라고 가르친다. 또 그러한 상태에 이르려면 기욕을 끊고 호흡을 조절하며 수진(타액을 삼키는 것)하고 신성을 길러, 정.기. 신을 '황정'에 응집시키라고 말한다.
김시습은 도교의 외단과 내단 사상을 모두 받아들였다.
『매월당집』권3에 '선도'로 분류되어 있는 그의 시에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노닐고자 했던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그는 「능허사」에서 세간을 초극하려는 뜻을 담았다. '인간 세상 풍파 일어나지 않는 곳 없는데, 여덟 나래 바람타고 오르니 큰 집이 있도다. 하계에는 하루살이 우글거려 좁기만 하고, 티끌이만 길이라 혐오스러뤄 어쩌리" 라고 했고, '흐뭇하고 여유로워 빈 배와도 같고 외로운 구름과도 같은'
경지를 지향하였다.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노닒을 '소요유'라고 부른다. 현세와의 모순을 깊이 경험하고 있던 김시습은'능허', 즉 '하늘로 오름'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실은 이상향에 대한 갈구일 뿐이지, 결코 현실의 일은 아니었다.

 


또한 병약한 육체를 치유하려고 연단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단사상보다는 노자의 사상 자체에 충실했던 듯하다.

 


『노자』와 『장자』는 똑같이 '도'와 '덕'이라는 두 개념을 사용했지만, 『노자』는 처세 방법을 중시한 데 비해 『장자』는 인간사회를 초월하려고 하였다.

『노자』는 천지 만물이 생겨나는 전체 원리를 '도'라고 하였다. 이 도는 의지로 말미암아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것 〔自然〕이기에,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道法自然). 도는 사물이 아니므로 '없는 것'〔無〕이지만, 천지 만물을 낳을 수 있으므로 '있는 것'〔有〕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온갖 묘함의 문'〔衆妙之門〕이다. 도는 천지 만물이 그로부터 생겨나는 총원리이고, 덕은 한 사물이 그로부터 생겨나는 원리요, 사물이 도에서 얻어내어 그것을 가지고 사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 변화의 공통된 법칙인 '항상됨'을 알라고 가르쳤다. 항상됨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함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공평하며, 두루 행하면서도 위태롭지 않다.
『노자』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있고 욕망을 충족하려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되,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이 많으면 많을수록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고 도리어 해를 끼친다고 경고하고, 욕망을 줄이기 위해서는 욕망의 대상을 감소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릴 것,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릴 것, 교묘한 기술을 끊어버리고 이익을 버릴 것을 말하였다. 또 욕망을 줄이고자 하므로 『노자』는 지식에 반대한다. 지식 자체가 욕망의 대상이며, 지식 때문에 욕망의 대상을 많이 알아 만족할 줄 모르고, 욕망의 대상을 얻으려는 노력이 한계를 모른다. 곧 "학문을 하며 욕망이 날마다 더해진다." 그렇기에 『노자』는 '바라지 않는 것을 바라는' 무욕(과욕)의 경지르 중시하며,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운다'는 무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한다.
김시습은 『노자』이 이러한 측면에 깊이 공감했을 것이다. 그는 사물 변화의 공통된 법칙을 밝게〔明〕알되, 지식을 욕망을 추구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보편 관념을 단호하고 간명하게 제시하는 그의 시와 문은 『노자』의 세계인식 방법이나 지식론과 매우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세상 사람은 너무도 허겁지겁
이(利)와 수(壽)를 위해 힘써
구구한 백 년 살이에
아등바등 본성을 지키기 못하네
하루아침에 위기를 맞게 된다면
후회한들 누구를 탓하랴?
그대는 세상 밖 사람이 되었으니
모름지기 세상 밖의 일이나 하게.
세속의 완악한 무리처럼
번복하여 평소의 뜻을 잃지 말고.
                                    -오언절시 한자 있슴-p426

 

 

 

김시습은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인간이 덕으로 삼는 바"하고 유가적 관점에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인을 행하는자는 사욕을 이기는 극기를 이루어야 천지 만물과 더불어 유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仁)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으로, 내가 이것을 덕으로 삼는 바이다. 대부분 마음의 전덕(全德)은 지극한 이치 아닌 것이 없으며, 인이란 내가 그로 말미암아 태어나서, 만물과 더불어 이 원원(元元)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性) 가운데 주체로서 4덕(元.亨.利.貞)의 으뜸이 되어 나머지를 겸하여 포괄한다. 오직 그것들을 겸하여 포괄하는 까닭에 정에서 발하여 사단(四端)이 되는데, 사단 중에서도 측은이 또 이것을 관통한다. 오직 그것이 관통하는 까닭에 수오, 사손(사양), 시비가 그 용(用)이 되어 동정(動靜)하고 운위(云爲)할 때 일찍이 인성(仁性)으로써 체(體)를 삼지 아니함이 없다. 만일 그 체가 없다면, 나의 어버이를 어버이로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분수와, 존비의 차이에 따라 등급을 두어 예절을 감쇄(減殺)하는 사이와, 공경하고 읍손하는 때와, 옳고 그름과 올바름과 사악함을 분변하는 때에, 사사로운 뜻이 망령되게 일어나 과실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을 하는 자는 모름지기 극기(자기의 사욕을 이김)해야 한다. 만일 자기의 사욕을 이긴다면 툭 트여 지극히 공평해서 함양하고 육성하는 것이 혼융하고 온전해질 것이요, 성(性)에 갖추어진 이(理)가 막히거나 차단됨이 벗고 사물 사이에 베푼 것도 각각 도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어져 천지 만물과 서로 유통하고, 만물을 낳고 낳는(生生) 이치도 두루 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천태 대사 지의는 불교의 오계(살생, 투도, 사음, 망어, 금주)와 유교의 오상(인,의,예,지,신의 다섯가지 덕)을 동일하다고 보았으며, 불교에서 설하는 계(戒).정(定).혜(慧)의 3학(學)을 유교의 도덕에 견주었다. 당나라 때 규봉 종밀 선사는 "공자. 노자. 석가의 교리가 안과 밖으로 서로 도와서 함께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김시습은 우주의 '도'(道)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나서, 또는 유교 또는 불교로 성립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 불교 내부에 있는 여러 다른 주장들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기에 『조동오위』에 관심을 갖는가 하면, 『원각경』을 읽었으며, 『화엄석제』를 지었다.

그는 하나의 교법에 집착하지 않고 무심(無心)하고자 하였다. 분별을 떠난 경지에 비로소 밝은 빛이 비춘다고 보았던 것이리라.


불교의 교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불교의 교리를, 유교사상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유교사상을 말해주었다.


정도전은 '마음은 기'〔心卽氣〕이고 '성은 이'〔性卽理〕이므로 마음에는 지각고 유위가 있으나 성에는 지각도 유위도 없다고 하면서, 불교에서도 마음을 성이라 혼동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나 유교의 신앙 행태를 비판했을 뿐, 불교나 유교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큰 고통은 정이 많은 것     人間最是多情苦


김시습은 북명(北銘)이라는 글에서,
쪽박 물과 찬밥을 먹을지언정 자리 차지하곤 공밥 먹지 말며
한 그릇 밥 받으면 걸맞는 힘을 써서 의리에 맞아야 하리.
하루 닥칠 근심보다는 종신 근심할 일 근심하고
파리함을 괘념하지 말고 뜻 바꾸지 않는 즐거움을 즐겨야 하리.
염치 지키는 선비 풍모를 숭상하고
간특한 세속의 작태를 미워하라.
뭇사람 칭찬에 기뻐하지 말고
뭇사람 깔봄에 노여워 말고,
기꺼이 천리를 따르면
유연히 깨치게 되리.
무심히 봉우리 위로 피어나는 구름 그림자같이
사심 없이 허공에 달려 있는 달빛과도 같이
기거 동작에서 겉껍데기 육신을 잊어버려
삼황 때의 순박함을 보존하고
몸가짐과 행동에서 옛 성인을 상상하여
요순 삼대의 전형을 따라라.
부디 그대는 반성하여
북쪽 벽에서 느끼시라.
                                -자유절시 한자 있슴-p439~440

남효온이 의분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며, 김시습을 스승으로 섬기고 세상 밖에서 놀아 세속에 관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남효온은 젊어서 『노자』에 뜻을 두어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기약한 반면에, 『장자』는 세상을 피하는 일만 조장했다고 비판하였다.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윤회설에 대하여, '사람이 죽어 형체가 없어지면 이(理)와 기(氣)가 나뉘어 형질은 흙으로 바뀌는 법이거늘, 어찌 마음이니 형체니 하는 것이 있겠는가?"하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유와 불을 논함」이라는 시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종파적 분상을 초월한다면 본래의 진실은 같다고 하였다. 그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라만상은 모두 각각 다르지만, 옛날고 지금은 한 필 말로 달려가듯 이치가 동일한 법. 만일 가지마다 같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본래 근본이 하나임을 모르는 것이다. 흑과 백은 같은 색일 수 없고, 유교와 불교는 자취가 다르다. 누가 장상영이 훌륭하다 말하는가? 유교의 이치를 끌어다가 불교에 붙였거늘. 네모 모양을 깎아 둥근 모양을 만들다니, 무지한 설로 인의를 더럽혔도다. 요컨대, 본원이 똑같음을 똑똑히 알아야 하리라. 『장자』「서무귀」편에서 말하듯이, 황제가 구자산에서 대외봉을 보려 했을 때 수행하던 여섯 성인 과 황제가 모두 양성의 들판에서 길을 헷갈렸다는 우언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길을 어찌 쉽게 말하랴. 각자가 돌아가 자기의 비천하고 여리고 약한 본성르 지켜야
하리라. 모름지기 황제가 가려 했던 구자산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그대의 의혹이 풀릴 것이다.

김시습이 관동으로 떠나기 전, 언젠가 남효온은 김시습에게 "나의 견식이 어떠하지요?"라고 물었다. 김시습은 "창에 구멍을 뚫고 하늘을 엿보는 격이지"라고 하였다. 다시 남효온이 "동봉(김시습의 호)의 견식은 어떠하게요?" 하자, 김시습은 "나는 넓은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지"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김시습은 자부심이 강하였다.

한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치려 해야지, 온갖 계책으로 임금을 을러서는 안 됩니다. 경계(警戒)가 되는 유익한 말로 뜻을 펼치려 해야지, 해독을 끼치는 말로 헷갈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을 도모하고 계책을 헤아릴 때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열고 공정한 도리를 펼치며, 몸가짐을 바로잡아 아랫사람을 이끌 때는 대체(大體)를 돌아보아야 하지, 세사한 일들은 줄여야 합니다. 아! 일신(一身)이 이해(利害)를 돌보지 않는 '비궁'(匪躬)을 실천한다면, 거의 올바른 도리에 가까울 것입니다.

서거정은 김시습이 다시 방랑길에 나서는 것을 알고 「잠상인 시의 운자에 차운하여 빨리 써내다」라는 시를 주어, 김시습이 사상적으로는 "성인 공자를 흠모하고, 여래 존자를 예찬하며, 제자백가에 출입하여, 이쪽 저쪽에서 원두를 만난 듯하고", "문장은 천기에서 나와 대단히 풍성하여 파도가 뒤집듯 하며, 필세가 굳건하고 의기 어찌 그리 우뚝한지"라고 탄복하였다. 그리고 "그대는 보지 못했나, 경박하게 저자의 이익을 쫒듯 하는 장안 사람들의 교제는,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손 엎어 비 내리게 하듯 하는 것을. 소동파와 참요자, 그 옛 분들의 교제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 그대와 함께 그런 교제에 이름을 걸어서 이름을 불후하게 하리라"라고 하여 김시습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다짐하는 듯하였다.

 

성리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우주의 궁극적인 존재를 태극이라 하고, 이 태극은 모든 소리나 빛깔이나 형태나 냄새가 없어 감각에 포착되지 않으며, 따라서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극(無極)이라고도 하였다. 무극으로서의 태극은 움직여서 양이 되고 고요하여 음이 되며, 음과 양 두 기운이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한다고 설명하였다. 주희에 이르러 태극은 이, 음양은 기로 다시 정의되고,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형식 또는 규율, 기는 시간과 공간 속의 모든 존재들이 갖추고 있는 질료를 가리키게 되었다. 김시습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주희의 『태극도해』로 설명하였다.
태극이란 극이 없는 것이다. 태극은 본래 극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이요 음양이 태극이다. 이것을 태극이라 일컫는다. 만일 따로 극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극이 아니다. 극이란 지극하다는 뜻으로, 이가 지극해서 더 보탤 수 없다는 말이다. 태(太)란 포용한다는 뜻으로, 도(道)가 지대(至大)해서 그것과 짝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음양의 바깥에 따로 태극이 있다면 음양이 되게 할 수 없을 것이요, 태극 속에 따로 음양이 있다면 태극이라 말할 수 없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며 동(動)이 정(靜)이 되고 정이 동이 되니, 이의 무극이 태극이다. 그 기는 곧 움직이고 고요하며 열고 닫고 하는 음양이다.


다만 김시습은 우주는 무한하며 기가 순환하는 운동체라고 보고,태극은 이가 아니라 기라고 보아 이를 기와 별개의 독립체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른바 기일원(氣一元)의 관념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의 구성과 생성 변화를 기로 설명하였다. 이 점에서는 송나라 유학 가운데 장재의 사상과 유사하다. 특히 주희가 이를 원리, 기를 질료로 설명하면서도 이의 독립성과 주재성을 인정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김시습은 충량한 신하가 모함을 받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 「양보음」에 차운하였다.

무엇이 가장 큰 명예입니까.
무엇이 가장 큰 재물입니까.
무엇이 가장 큰 덕망입니까.
무엇이 가장 큰 친구입니까.
                                -잡아함 제1282경

 

 

 

 

계율이 가장 큰 명예이다.
보시가 가장 큰 재물이다.
진실이 가장 큰 덕망이다.
은혜가 가장 큰 친구이다.
                                 -아함경 시편 -이 부분은 내가 적어 넣은 글(본 책엔 없는 내용) 

 

 

 


가을 장맛비가 초가 처마를 적시는 밤
일어나 앉아 멀리 그분을 생각한다.
나는 바른 길 배우려다 개 모습 그린 꼴
우두커니 앉아 세월만 보내다니.
세상 사람은 미치광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 도는 깊은 산에나 묻혔구나.
괜스레 술 나라 속 헤매다가
집 헛간에 고꾸라지고 말았네.
                 -오언절시 한자 있슴-p486

 

봄 산을 동무 없이 홀로 가노라니
원숭이는 쌍쌍이 앞뒤로 따르네.
떡갈나무 잎은 시내 덮어 오솔길 없어지고
솔 그루터기는 바위에 넘어져 길을 막았네.
해마다 밤을 주워 가난함을 잊고
곳곳마다 초가 엮어 편한 대로 살아가네.
평생 따져보아도 바쁜 일이 없어
세간의 구속을 겪은 적 없다네.         
                   -칠언절시 한자 있슴-p505


또 다른 삶이 있어 푸른 산에 사니
한가로운 정취를 세인에게 말하지 않으련다.
이끼 낀 외길을 긴 대숲으로 내고
소나무 천 그루로 작은 산을 에워쌌네.
산새 내려와 법회를 엿보고
골짜기 구름은 찾아와 조사의 현관을 보호하네.
누가 널 위해 「초은사」를 지어
"붉은 계수나무를 어떻게 오르려오?"라고 하랴.
                    -칠언절시 한자 있슴-p505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여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오언이라 한다. 김시습은 바로 오언의 참맛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청정한 자연은 고독감을 자아낸다. 김시습은 산수 자연이 인간의 틈입을 거부하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점경(點景)으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 세상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김시습은 그 허허로움을 배워 세상을 보는 시선에서 원망과 증오를 버렸다.

 

김시습은 산수 속에 노닐어 불평불만을 털어버리고 맑은 감흥을 얻고자 하였다. 그리고 때때로 자연을 관조하기도 하였다.
산수를 대상으로 삼아 노래하는 산수시는 본래 산수 자연 속의 은둔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노장철학과 친연성이 있다. 하지만 노장철학과는 달리 산수 속에서 도(道)와 성스러움을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 있다.

독산원기를 적으면서 김시습은 스스로를 췌세옹이라 칭하였다.
세상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군더더기라는 뜻이다.


철 지난 가을, 파리가 가녀린 날개를 치며 하늘을 향해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김시습은 문득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와 같이 스스로의 왜소함을 모르고 지나친 열망과 욕심만 지닌 것이로구나 생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상의 사물들을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나누어보려는 의식이 자신의 내부에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던 것이다. 사물들은 잘난 것은 잘난 것대로, 못난 것은 못난 것대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나선다.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잘나고 못나고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잘난 것만을 눈여겨보고 못난 것에는 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올바로 이해하는 태도가 아니다. 김시습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한없이 고양된 본래성의 모습과 함께, 한없이 더럽고 못난 현실성의 모습을 보았다. 그 본래성과 현실성리 뒤엉켜 서로 뒤집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이고 현실세계라른 사실을 똑똑히 알았다.

 


"엄자릉(엄광)은 명리에 등한하지 않았나니, 명리를 좇으면 결국 한가함에 이르지 못하는 법"

 


김시습은 세간사를 떠올리고는 그것과 대비할 때 스스로의 한가함은 너무도 즐거웠고, 마음을 다잡는 공부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자신이 벼슬길을 실제로 지나온 것은 아니지만 속세간의 명리에 뜻을 두었던 적도 있었으니, 그것은 흡사 벼슬길에 나섰던 것과 같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벼슬길은 촉도(蜀道)보다 험하니, 몇 번이나 수심으로 만첩 산을 지나왔던가?" 라고 술회하고, 명리에 골몰하여 인간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세상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겼다.

 

 

세간에는 조삼모사의 속임수가 횡행하고, 근년의 역사마저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군주를 위해 정무를 통괄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싶지만,
조정에 가득한 사람들 가운데는 진정한 충군 우국의 인사가 없다. 물론 나도 쓸데없는 책을 읽어 행실이 어그러져 있으며, 실없는 소리나 해대고 빈 목소리만 높다. 하지만 곡학아세하는 무리가 조정에 가득한 것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난다. 조정에 들어 비단 도포 걸치느니, 차라리 담쟁이덩굴과 댓가지로 얽은 삿갓 쓰고 연잎으로 엮은 옷 걸치고 강가에 숨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곳에서 세간의 일을 말하지 말자꾸나, 말하기만 하면 세간의 잘못된 일만 말하게 되니"라고.

 


원효가 만법귀일(모든 차별이 결국 근원적인 한 이치로 돌아감)을 믿어 종파적 대립을 초월한 화쟁논법을 편 것과 마찬가지로.

박세당은 "도를 지향하는 한 방내. 방외를 구분하지 않으며, 또한 도에 노니는 자는 이것과 저것의 상대적 분별을 잊는다"고 하였다.

 

맹자 견 양혜왕하신대 첫 말씀이 인의예지
주문공 주에도 그 더욱 성의정심
우리는 하올 일 없으니 효제충신하리라.


나는 알지, 나는 알지
손뼉 치며 깔깔 한바탕 웃노라.
옛날 잘난 이 모두 양(羊:본질, 생명)을 잃었나니
시냇가에 초가 지어 사는 것만 못하리.
험한 길에 서서 버티려 애쓰다니
편히 앉아 아침 햇볕 쪼임만 못하리라.
인생 백 년은 기장밥 익는 시간일 뿐
담소하며 뽕나무로 거북 삶는 걸 경계하는 것이
백 번 천 번 옳기에
좌망(坐忘:무아의 경지에 듦)만 못하리라.
푸른 산 높디높고
푸른 시내 넘실대는 곳에서
홀로 노래하고 홀로 춤추며
근심도 즐거움도 모두 잊으리.
쓰러지다간 눕고
길 가다간 주저않고
땔나무를 줍다간
참외 따면서.
한 벌 베 적삼에
팔 걷어붙여
앙상한 뼈, 솟은 힘줄 드러내고
농군 모자 끈을 늘어뜨린 채
남과 나의 구별을 아예 모르리.
달 아래 요뇨탄 가를 거닐며 노래 뽑다가
구름 자욱한 골짝으로 들어간다, 어허허.

 

 

 

 

 

 

 

 

 

 

 

시대의 비판자, 귀속을 거부한 자유인

 

 

 

 

 

 

 

 

 

 

 

심경호 선생의 책머리에

 

서구 철학자 니체와도 닮은 면이 있다.

 

그는 "수심 가득한 창자를 묻을 곳은 어디인가?"

차라투스트라의 "나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것을 찾아 헤맸지만 발견하지 못하였다"라고 유사한 울림을 지닌다.

 

권력층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점, 인간 존재와 사상의 문제를 진지하게 탐색하였다는 점,

당대의 현실 공간에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건지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자유의 길이었다.

 

 

고독하였기에 자유로웠고, 자유롭고자 하였기에 고독하였다.

 

조동종을 신라 스님들이 발전시키고, 그 맥을 일연과 김시습이 이었으며,

그것을 다시 만해 한용운이 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서여에게서 배웠다.

 

 

몸과 생명을 중시하여 수련 도교를 실천한 혁신적 사상가로서,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동정한 인도주의자로서,

국토 산하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역사미를 발견했던 여행가로서,

그의 일생은 다양한 면모를 지녔다.

 

그는 삶을 짐스럽고 괴로운 고해라고 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순간순간을 즐기고자 했고,

현실세계에 뭔가 장대한 이상을 전하고자 하였다.

 

 

소박한 생활과 몸 자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도가사상

 

 

그는 개체로서의 인간이란 결국 무한한 생명계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아주 작은 입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통곡했지만,

인간 존재의 존귀함을 자각했으며 생명의 연대의식을 중시하였다.

 

 

 

 

 

 

 

 

 

 

 

 

 

 

 

자평

귀속을 거부한 자유인은 여행가로, 사상가로, 인도주의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대의 비판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언급되지 않았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평전을 대하곤 김시습에 대한 열정에 더 목이 마르다..

아직도 도서관을 더 서성여야 할 이유가 존재하다.

 

심경호선생, 중앙도서관, 돋보기, 내 건강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