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당국선도 제32호에 실린글 - 심안(心眼), 혜안(慧眼), 도안(道眼)
심안(心眼), 혜안(慧眼), 도안(道眼)
의상법사 이 근 용 영산대학교 교수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무엇을 보면서 산다.
아침에 눈 떠서 잠들 때까지 가족들 얼굴도 보고, 텔레비전이나 책도 보고,
꽃이나 나무, 산도 바라보면서 산다.
영상 시대라서 그런지 지하철을 타 보면,
휴대폰으로도 무엇을 열심히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마디로 우리는 세상을 보면서 산다.
매일 보는 대상은 하는 일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매일 새로운 것을 보면서 살고,
어떤 사람은 매일 같거나 비슷한 것을 보면서 산다.
대개는 눈을 뜨고서 보지만, 어떤 때는 눈 감고서 무엇을 그려보거나 상상하면서 본다.
잠잘 때도 꿈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 테니
우리는 거의 하루 종일 무엇을 보면서 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접하고 관계를 맺는 중요한 행위이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의례히 그렇듯이 우리는 본다는 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서 산다.
그리고 본다고 하면 대부분 육안으로 보는 것을 생각한다.
신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물론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비스듬히 보거나 거꾸로 보면 대상을 왜곡해서 보게 되고,
대상의 한 부분을 마치 전체인 양 보면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대상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우선 육안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세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기 위해서 전자현미경, 천체망원경,
적외선안경 같은 것들을 이용하지만, 그래도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중에는 외부 대상도 있지만,
인간 내면의 감정의 흐름, 취향, 의도 같은 것들도 있다.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여러 심리측정 도구들이 이용되고
거짓말탐지기 같은 것들도 동원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다.
더러 눈치 빠른 사람이나 육감이 발달한 사람들이 있어 남들보다 낫고,
정신과 의사나 상담치료사처럼 특별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육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동원하고 키우는 것이 심안(心眼)이다.
우리는 살면서 심안으로 보고 판단해야 할 경우를 자주 맞게 된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마음의 눈으로 보고 헤아려야 할 경우가 많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나 표정, 말 가지고는 다른 사람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이 때는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심안을 키우면 다른 사람을 보는 눈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보는 눈도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심안을 키운다는 것은 이해와 관용, 지혜의 폭을 넓힌다는 의미를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련을 하는 목표중의 하나도 심안을 열고 키우고자 하는 데 있지 않나 한다.
국선도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도 어느 순간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석연치 않았던 의문이 풀려지는 것 같고, 어렵게 보였던 문제가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국선도 수련이 생각을 몰두해서 깊이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경험이 심안을 열고 키우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물질세계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가시광선 파장내의 대상들뿐이고,
자외선, 적외선 밖의 파장 대에 있는 물질들은 볼 수 없다.
맑은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별들을 낮에는 햇빛 때문에 볼 수가 없다.
정신세계에서도 우리가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없음은 물론이다.
정신세계를 우리는 어떤 징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우리는 심안을 키울 필요가 있다.
육안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심안으로 짐작하고 유추하고 알아챈다.
필자는 심안에도 종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육안에도 정상적인 눈과, 근시ㆍ원시ㆍ난시와 같은 증상에 따른 눈이 있듯이,
심안에도 밝은 정도에 따른 차이나 어떤 방향으로 밝으냐에 따라
나누어질 수 있는 종류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의 이면이나 사물의 이치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거의 매 순간 심안을 이용하고 있다.
단지 심안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우리는 육안으로 무엇을 보는 순간,
이미 심안을 작동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 순가, 우리는 육안으로 보면서 동시에 마음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우리는 어려서는 육안으로 세상을 보면서 배우고 익히다가,
성장하면서는 점점 심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는 꼭 육안으로 보지 않고도
대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가서는 심안이 육안을 앞지르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먼저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보고, 다음에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마음으로 보고자 하는 것만을 육안으로 보려고 한다.
심안이 육안을 앞지르게 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마음으로 미리 해석하고 판단한 상태에서 대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당초에 대상을 온전하게 보고자 해서 심안을 키웠던 것인데,
이제는 거꾸로 심안이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심안을 올바른 방향으로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심안을 얘기할 때는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심안이 열리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든가,
세상의 이치를 들여다 볼 수 있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심안을 밝게 바른 방향으로 키우지 못하면,
심안이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다.
심안이 육안을 가리고 흐리게 한다면 차라리 심안이 열리지 않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심안은 육안의 한계를 넘어 실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보게 하는데 그 본령이 있다.
심안은 혜안(慧眼)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혜안은 사전적으로는 '사물을 밝혀 보는 총명한 기운이 서린 눈' 이라는 의미를,
불교적으로는 '차별ㆍ망집(妄執)의 생각을 버리고
우주의 진리를 통찰하는 안식(眼識)'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혜안은 불가에서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도 널리 통용되는 말이다.
간단히 '지혜롭게 사물을 보는 눈' 이나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눈'
정도로 새기면 좋을 것이다.
심안이 혜안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한다.
혹시 선입견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성에 빠져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스스로 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나 경험한 것을 때로는 지식으로,
때로는 기억이나 추억으로 머리 속에 쌓아 두게 된다.
이것들이 또 다른 대상을 보거나 경험하는 데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과거에 쌓아 둔 지식이나 기억을 바탕으로 다른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성인은 살아오면서 형성한 자신의 관점, 즉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가지고 사물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는 것은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치관이 서 있지 않으면 우리는 처음 겪는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어떤 상황을 맞아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일관성을 잃게 된다.
한편,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일단 형성하게 되면,
모든 상황을 이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상황에 따른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대처를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경향을 더 보인다.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가치관을 지나치게 고수하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가 혜안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이나 가치관이 올바른 것인가를
늘 되묻는다는 의미와 통하는 것이다.
자신을 늘 되돌아보고 나날이 새롭게 세상을 살아가는[日新] 자세는
선각자들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덕목이다.
요컨대, 밝게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은 우리가 어떤 편견이나 가치관에
구애 받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할 때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혜안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깨침을 얻었을 때 혜안을 가진다고 말하기보다는,
혜안을 가져야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의미도 된다.
그렇다면 혜안이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로운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개개인이 혜안을 가지고 보고자 하는 목표를 모두 다르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혜안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실상을 보고자 하는 목표를 갖는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본다'는 말의 속성 자체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본다' 는 것은 기본적으로 가상이나 허상이 아니라,
실상이나 진상을 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심안으로 보고,
가려지고 흐려진 심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혜안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면 혜안이 보고자 하는 세계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라고 해도 아직 우주의 실상은 밝혀져 있지 않다.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동양에서는 이 실상의 세계를 도(道)의 세계라 칭해 왔다.
꼭 꼬집어서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있는 세계,
현묘해서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세계를 상정해 왔다.
이 세계를 보려면, 그에 합당한 눈을 가져야 한다.
혜안이 도안(道眼)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안은 도의 세계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심안으로 보고,
심안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을 혜안으로 보려고 했듯이,
우리가 도의 세계를 보려면 도안을 갖춰야 한다.
도의 세계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듯이 도안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단지 '도의 세계를 보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눈' 정도로 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도안은 켄 윌버(Ken Wilber)가 얘기하는 '관조(觀照)의 눈'과 통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윌버는 초월영역의 세계를 보려면 감각의 눈이나 이성의 눈이 아니라
'관조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아이 투 아이 (eye to eye)』, 2004).
관조의 눈으로 본다고 해서 감각의 눈, 이성의 눈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따라 합당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도를 닦고 도를 추구하는 수련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도안을 갖추려고 힘써야 할 것이다.
예술의 세계에서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한다.
대상에 따른 눈높이를 갖춰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국선도 수련인 역시 심안을 열어서 혜안으로 키우고,
나아가 도안으로 세상을 들여다보고자 할 때,
수련의 목표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본다'고 한다.
주역의 스무 번째 괘인 풍지관(風地觀)에도 관천하(觀天下), 관아생(觀我生),
관민(觀民)이라고 하여 세상을 살피는 것이 강조돼 있다.
세상의 실상을 바로 알고 살핀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가 매 순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본다'는 행위 속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