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당국선도

덕당국선도 제24호에 실린글 -오직 의를 따르고자만 한다면

艸貞 2010. 10. 24. 05:19

 

오직 의를 따르고자만 한다면

 

                                                                                          의상법사 이근용 영산대학교 교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을 잠시 돌아보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계속 채우고 쌓고 붙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끼니때마다 배를 채우고, 지식과 정보로 머릿속을 채우며, 집안에 가재도구나 재화를 쌓고,

유형무형의 담을 쌓고, 인간관계와 인연의 끈을 붙잡고 살고 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나라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시장경쟁 위주의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휩싸여 있다는 점에서 보면,

각 조직이나 나라가 더 많이 채우고 쌓고 관계 맺기 경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수련하는 사람들이라고 이 경쟁에서 예외일 수 없다.

수련하는 동안은 일상의 틀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 하다가,

수련장을 나서면 다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수련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은 결국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외면적으로는 수련하는 사람이나 안하는 사람이나 같은 생활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면적으로는 차이가 없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그 차이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차이라는 것이 차별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아님은 물론이다.

 

국선도 회원들은 모두 나름대로 생업을 꾸려가고 있다.

크고 작은 기업에 속하거나, 개인 사업을 하거나,

공직에 있거나 간에 각자가 생업의 장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수련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

그리고 회원들이 수련하고 있는 것을 직장의 동료나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다.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수련하는 사람을 보면,

뭔가 평범한 사람하고는 다르리라고 기대를 한다.

우선 표정이 밝고 건강해 보이고 기운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언행이 일치한다든가 성실하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실제 수련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변 사람들의 기대나 시선이 부담스럽다.

수련을 하니 기운도 넘치고 주량도 세져, 가끔 호기도 부리고 싶고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고 싶은데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러지를 못하니 갑갑하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주변의 시선과 기대가 시간이 가면 점점 익숙해진다.

본인의 수련도 깊어지면서 나름대로 어떤 수련인 상을 떠올리게 된다.

 

일정한 기간을 지나면 수련하는 사람은 남의 기대와 자신의 희구를 담은 수련인의 이미지를 그리게 되고,

결국은 그 이미지를 실생활에서 구현해 보려고 하게 된다.

국선도 회원 역시 누구나 나름대로 지향하는 수련인 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생업을 영위하면서도 각자가 가진 수련인 상에 따라

외적으로 풍기는 분위기와 멋이 달라진다.

 

필자도 나름대로 가진 수련인 상이 있다.

그것은 '비우고 덜고 놓으면서 가는' 수련인 상이다.

배와 머릿속을 비우고, 지고 가는 짐을 덜고, 인연과 관계의 끈을 가급적 줄이고 놓으면서

가는 수련인 상을 그리면서 산다.

문제는 이 상의 이미지대로 살기에는 생업의 장이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남들과 같은 일을 하고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이런 상을 유지하면서 버티고 살기에는

우리가 부닥치고 해결해 가야 할 장벽이나 과업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떤 일은 꼭 돼야 하는데 하며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이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는데 하며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열심히 일을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하고 기대하는데

실제로 나온 결과가 성에 안차서 비난을 받고,

어떤 때는 건성으로 해서 결과가 나와 포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는다.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 맹자는 이런 것들을 일러

'구전지훼(求全之毁)', '불우지예(不虞之譽)' 라고 했다.

 

이런 일들을 겪게 되면 여일한 마음을 가지기가 어렵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의 기복을 겪게 된다.

남들은 앞서 가는데 나는 자꾸 뒤쳐진다.

남들보다 건강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것으로 위안을 삼아 보지만,

마음 한 구석은 왠지 허전하다.

남이 흥분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욕심을 부리고, 원망하고, 권태로워 하고,

의기소침해 하면, 내 마음도 편치 않다.

 

마음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 가끔은 성현들의 말씀에 의지해 보기도 하고,

동시대 선각자들의 명언에도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면 한결 나아지기는 해도 마음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한 때 같이 일을 도모할 사람들을 찾아다니려 한 적이 있다.

될 수 있으면 수련하는 사람들이면 좋겠지만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마음을 미혹에 빠지지 않게 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도 서로 찾으면서,

마음을 합쳐 구활창생의 길을 같이 갈 사람들을 찾았다.

그러다가 더러는 의기투합한 사람을 만나 밤을 새기도 하고,

곧 뭐가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마음 부풀었던 적도 있다.

아직도 이 바람은 여전하며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비우고 덜고 놓고 가는 것을 이미지로만 그리면서,

체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념들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비우는 것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마음 찌꺼기까지 비워야 하는데

아직 육신을 비우는 단계에 머물고,

짐을 더는 것도 보이는 짐만 덜려고 하고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의 짐이나 업장을 덜지는 못하고 있고,

인연의 끈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오히려 늘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한걸음 더 나가 생각해 보면, 비우고 덜고 놓고 갈것도 없는데

허상에 집착해서 갖가지 상념들이 밀려 오는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 깨침과 깨달음에 관한 책(박성배, 『깨침과 깨달음』)을 읽었다.

이 책에 의하면 깨침과 깨달음은 다르다는 것이다.

깨침은 단번에 알아차림이라면,

깨달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 점진적인 알아차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한다.

'나는 부처이다'라는 것이 깨침에 해당된다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깨침은 결국 돈오돈수와 연결되고, 깨달음은 돈오점수와 연결된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요지는 나는 부처라는것을

단번에 몰록 깨침을 통해서 믿음의 힘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나도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서는 약하다는 것이다.

 

수련에서도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단계가 올라갈수록 점점 더 느끼게 된다.

연정화기(煉精化氣) 단계에서보다는 연기화신(煙氣化神) 단계에서 더 중요하고,

연기화신 단계에서보다는 그 다음 단계에서 더 중요한 것이 믿음이 아닌가 한다.

믿는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믿음의 힘은 수련에서도 역시 중요한 지렛대이다.

필자가 그리는 '비우고 덜고 놓고 가는' 수련인 상을 구현하는 것도

믿음이 뒷받침돼야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깨침은 깨짐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깨달음과 또 다르다고 한다.

껍질이 부서져서 깨지든 기존의 어떤 허상이 깨지든 무엇인가가 깨져야 깨침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수련인 상이라는 것도 깨지기 위해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얼마나 비우고 어디까지 덜고 놓느냐 하는,

비우고 덜고 놓는 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건 한 순간이라도 비우고 덜고 놓으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내가 깨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있고,

어느 분이 말씀하신 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단지 세상은 그대로인데,

깨친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내가 깨친 사람인데,

세상이 전과 다르게 이렇게 보인다고 하면서 외치고 다닐 수도 없다.

 

수련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수련하는 사람이 나름대로 이상적인 수련인 상을 그리면서 정성껏 수련을 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고 깨침의 단계까지 갔다고 하자.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생업을 버리고 수련에만 전념할 수는 없고,

여전히 일을 하면서 닦아 나갈 것이다.

주변 환경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도 그대로이다.

 

내 주변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나,

내 눈에 비쳐지는 주변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보인다.

그러면 안 되는데, 억지를 쓰고 고집을 부린다.

어떤 일은 꼭 그렇게 돼야 해서 말을 해 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몇 번 조언을 해보아도 달라지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입을 닫는다.

답답함과 아쉬움을 혼자 속으로 삭인다.

어느 때는 속에서 폭발할 것 같기도 하다.

한번 터트려 질타를 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참으며 지켜볼 것인가,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국선도 회원들의 생업의 장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만큼 부딪치는 문제들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사범 지도자급 이상 분들만 해도 1천여 명이 넘고,

전국의 수련장도 수백 개에 이른다.

진기 이상 고급 단계의 수련자만 해도 수 만 명은 족히 될 것이다.

이 분들이 각기 생업의 장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치고 어떻게 고민하면서 해결해 가는지 궁금하다.

단지 모두가 주변사람들로부터 '수련하신 분들이라 역시 다르구나'

하고 주목을 받으면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계시리라 믿는다.

 

고급 단계의 수련을 통해서 상당한 경지에 가 계신 분들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문제를 접하다 보면,

가끔은 앞에서와 같은 이유로 터트려야 할지 참아야 할지,

내 주장을 밀고 나가야 할지 접어야 할 지 고민에 빠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럴 때, 혹시 참고가 될까 하여 논어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있어서 오로지 주장함도 없으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어서 의를 따를 뿐이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此)

 

이 구절은 필자가 '꼭 이렇게 돼야 하는데, 저렇게 되면 절대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스트레스가 몰려오려고 할 때 떠올리는 구절이다.

시중(時中)의 길은 백척간두와 같아서, 순간 방심하면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어느 정도 수련을 한 우리 눈에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세상이 그렇게 보이리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고 오만일 수 있다.

 

겸손하게 오직 의를 따르고자만 한다면,

가까운 한두 사람은 감화되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또 다른 한두 사람을 감화하고, 그러면 언젠가 세상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2010. 10.23일 수료식때 의상선사 이근용 교수를 만났다.

맘 속 흠모가 넘쳤는데 나의 첫 인사는..

"이 상근교수님의 글을 회지에서 보았습니다.

 글이 너무 좋아서 뵙고 싶었습니다.."

 

 

첨 첨 만나 뵈었는데..

이런..

법사호와 성함이 뒤죽박죽이 되어서리.. 

이렇게 죄송한 일이..

 

 

"죄송합니다."

 

 

하고 어찌 감화되는 사람이 한두 명만 있겠습니까..?

국선도 전체인의 바람인것을요..

달라지는 세상 기대해 보겠습니다.

 

 

 

 

 

하고 뵙게 되어 크나큰 광영이 있었나이다..

 

道안에 누가 있어..  道人이더냐..?

 

존경심 철철철..

 

세월은 어느새 법사에서 선사지위로 올려놓았지만..

 

법사와 선사가 크게 다름이더냐..?

 

언젠가 기회되면 직접 여쭙고 싶고나..

 

밥그릇 수가 다르고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