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堂國仙道 제23호에 실린 글-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 길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 길
의상법사 이 근용 영산대학교교수
요즘은 살면서 不動心(부동심)을 갖기가 쉽지 않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탓도 있고,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을 많이 접하는 탓도 있다.
우리가 일상 듣는 말에는 주로 매스컴을 통해서 접하는 유력인사들의 말도 있고, 늘 접하는 가족이나 동료들의 말도 있다.
어떤 말을 들으면 흥분하게 되고, 다른 어떤 말을 들으면 반갑고 기쁘기도 하고, 또 화가 치밀기도 한다.
듣는 말도 있지만, 우리가 직접 하는 말도 있다. 때로는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 하는 말도 하게 되고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늘 좋은 말만 듣고 하게 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세상살이이니,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말이라는 것이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수련자의 입장에서도 말은 중요한 수행의 고리인 셈이다. 묵언 수행, 구업(口業) 같은 말들이 수련과 말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수련을 하다 보면, 과거에 들었던 말이나 했던 말이 떠올라 집중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기억에 묻혀 있던 한마디 말이 문득 떠올라 새로운 경계를 열어 주기도 한다.
수련과 말, 부동심에 관해서는 『맹자』에 나오는 내용을 일별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맹자는 제자인 공손추가 “선생께서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게 된다면 패자와 왕자의 업을 이루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와 같이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게 되더라도 마음이 동요되시지 않겠냐”고 묻자, 맹자는 “나는 40세에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노라”하여 ‘부동심’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맹자는 ‘부동심’을 이루는 방법이 있냐는 공손추의 질문에 자신이 장점을 가진 것으로 ‘지언(知言)’ 과 ’양기(養氣)‘ 를 제시한다. ’지언‘은 말을 분간할 줄 안다는 것이며, ’양기‘는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것이다. 맹자는 지언에 대해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으니, 말의 병통은 마음에서 생겨나 정사에 해를 끼치며, 정사에 발로되어 일에 해를 끼친다”고 말한다.
맹자가 그릇된 것들을 가려낼 수 있는 말로서 제시한 네 가지 종류의 말들에 대해 좀더 풀어서 설명한 내용을 소개해 본다(조성기, 『맹자가 살아 있다면』).
첫째로, ‘피사(詖辭, 편벽된 말)’ 는 한 쪽으로 치우쳐 전체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언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극우니 극좌니 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아무리 자신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피사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피사를 통하여 상대방의 막혀 있는 점을 꿰뚫어 볼 수가 있었다.
둘째로, ‘음사(淫辭, 방탕한 말)’ 는 방탕하고 궤도를 벗어난 말로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언사이다. 겉으로 볼 때 호탕하고 자유분방하여 정신에 자유함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속에 무언가 감추고 있는 바가 있는 것이다. 맹자는 바로 이 점을, 음사를 꿰뚫어 분별할 수 있었다.
셋째로, ‘사사(邪辭, 부정한 말)’ 는 간교하게 속이는 말로 이단사설에 빠져있는 말이다. 한쪽 면을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혀 잘못된 관점에서 말하기 때문에 모두 엉터리인데도 교묘하게 논리를 갖추고 있는 언사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런 사사를 통하여 속이려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넷째로, ‘둔사(遁辭, 도피하는 말)’ 는 스스로 이론이 궁색함을 알고 핵심을 피해가는 언사이다. 맹자는 이런 둔사를 통하여 상대방의 학문의 깊이를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상대방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맹자는 “무엇이 호연지기라고 합니까” 라는 제자의 물음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그 기(氣)됨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니, 정직함으로써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이 호연지기가 천지의 사이에 꽉 차게 된다. 그 기됨이 의(義)와 도(道)에 배합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 이 호연지기는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의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엄습하여 취해지는 것은 아니니, 행하고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면 호연지기가 굶주리게 된다.” 라고 설명한다.
이것도 좀 더 쉽게 풀어 보면, 우선 기(氣)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굳센 것으로 바르게 길러서 손상을 입지 않게 한다면 천지간에 가득 찰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그 기는 도를 따라서 의와 함께 가야 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을 경우에는 기가 허탈해지고 만다.
다시 말하면, 기라는 것은 내면의 의를 모아서 길러지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의가 갑자기 들어와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동하는 가운데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있을수록 기는 자꾸만 빠져 나가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이 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의를 향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가 갑자기 길러지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음에 잊지 말고 늘 품고 있으면서 오로지 의로운 길을 가다보면 길러지는 것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사전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따르면, 호연은 ‘마음이 넓고 큰 모양’ 을 이르는 것이며, 호연지기는 ‘공명정대하여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이다. 이 도덕적 용기는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며, 아래로는 인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노래한 맹자의 《삼락장(三樂章)》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맹자가 이야기하는 ‘부동심’은 단지 마음의 동요가 없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어떤 것을 지향하는 데 흔들림이 없다는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흔들림이 없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언’이며 ‘양기’라는 것이다. 후대에 맹자가 의로써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한 이 언급을 두고, 그 전까지 주로 양생의 기로 인식되던 기 개념이 도덕적인 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숱한 말들을 들으며 살아간다. 정치가, 정부 당국자, 정당 대변인, 언론인, 학자, 종교인과 같이 말을 주업 내지 부업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야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도 들으며 살아간다. 이들 말을 우리가 제대로 분간하며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별다른 마음의 동요 없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 호연지기를 잘 기를 수 있다면,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갈 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이 피사, 음사, 사사, 둔사가 되지 않게 해야 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떳떳한 뜻에서 나온 말이 되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때와 장소를 가려 적절한 말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고, 마음에 사사로움 없이 말을 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말을 하자니 상대방이 상처를 받을 것 같고 안 하자니 떳떳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선의로 말을 했는데 악의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면 다른 뜻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이니 안 할 수도 없다. 수련을 하는 경우에도 도반들끼리 서로 격려하고 확인하는 말이 필요하고, 선배나 지도자 입장에 있는 경우에는 초심자에게 설명을 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말을 해야 한다.
『논어』에 말을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쳤을 때 새겨봄직한 구절이 있다.
“더불어 말할 만한데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 것이요,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도 말한다면 말을 잃는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잃지 아니하며 또한 말을 잃지 않는다.” (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不失人 亦不失言)
인간이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말의 중요성이나 위험성을 강조한 속담, 격언, 경구는 셀 수 없이 많다. 수련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분간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듣지 말아야 하는지 역시 중요하다. 말이 씨가 되고 나쁜 기운이 되고,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수련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좋은 말은 수련의 경지를 높이고, 경계를 넓히고, 고비를 넘게 하는 고마운 고리도 된다.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듣는 말도 많고 하는 말도 많다. 굳이 지식정보 시대니 미디어정치 시대니 하는 표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을 듣고 하는 것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말에서 벗어나 살 수 없다면,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 길을 가는 것, 역시 우리 수련의 목표로 삼아 봄직하다. 그것이 생활선도의 한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